


- 가톨릭 성교회 역사와도 같은 성비오10세회의 역사는 아름다운 신비이다. 많은 방해와 불확실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성을 지속해왔다. 소박하게 시작한 초기부터, 성비오10세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을 해왔으며 오늘날 전 세계에 로마 성전신앙을 전파하고 있다.
- 성비오10세회 설립
- 1962년 일찌기, 르페브르 대주교는(당시 성신신부회 총장을 맡고 있었음) 사제양성의 퇴보로 혼돈을 겪고 있던 신학생들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대주교는 처음에는 이 신학생들을 좀 더 ‘전통적’이라고 생각하는 신학교로 인도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나 라테란처럼 임시방편식의 조치가 실패함을 보고 모든 공적인 직무를 내려놓는다. 대주교는 천주님의 섭리에 이끌려 그의 도움을 계속 요청하는 신학생들을 받아들이고자 스위스 프리부르에서 신학교를 연다. 이들 신학생들은 가톨릭 대학에서 수업을 받았다.
- 1969년은 교회의 위기의 해였는데, 새미사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부르에서의 시작은 어려웠다. 예를 들면 대주교의 건강도 좋지 않았고 몇몇 신학생들은 떠나갔다. 그때 스위스 발레 주(州)의 가톨릭 단체들이 성 베르나르 캐논회가 매물로 내놓은 옛 수도원을 에콘 신학교의 부지로 매입하여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기증하였다. 그래서 1969년은 대주교가 신학생들을 위하여 준비하는 해가 되었다.
- 1970년 가을에 11명의 신학생들은 에콘 신학교에 입학하고 다른 신학생들은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프리부르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주교는 신학생들에게 지역주교 샤리에르의 승인을 받고 프리부르 교구에 성비오10세회를 설립하였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칙령은 1970년 11월 1일에 재가 되었다.
- 성비오10세회의 전파와 첫 번째 시련
- 1971년 6월, 대주교는 에콘의 기존 건물로 감당하기에는 신학생들의 수가 너무 많아 성비오10세 새 신학교 건물의 주춧돌을 축성했다. 1972~1973년 기간 동안 성비오10세회는 영국과 캘리포니아에서 종도직을 수행하였고 프랑스에서 아주 아담한 여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 1972년12월, ‘무소속 신학교’에 대한 프랑스의 언론 캠페인 덕분에 에콘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 1973년 북미의 새 신학교가 아마다(미시간 주)에서 개교하였다.
- 1974년 성비오10세회는 로마 근교의 알바노 라지알에 있는 성심형제회 수련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매입하였다. 같은 해 10월 40명의 초심자가 신학교에 들어오고 성비오10세회 사제 지망자는 130명, 수사 지망자는 5명에 이르게 된다.
- 그러나 1974년 11월, 2명의 종도방문자가 에콘을 방문함으로써 갑자기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그들이 에콘에 대하여 보고한 내용은 대부분 호의적이었으나 몬시뇰 데샹과 온클랭이 떠난 후 그들의 1)태도가 야기한 스캔들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회가 ‘자멸’ 하는 것에 협력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 결과 그 유명한 1974년 11월 22일 선언을 집필하게 된다.
- 성비오10세회의 대한 제제
- 1975년 2월 13일, 대주교는 3인의 추기경(가론, 라이트, 타베라)으로 구성된 위원회와의 ‘대화’에 초대 받는다. 대주교는 추기경들이 자신을 조사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는데, 그‘법정’이 무슨 권한을 지녔는지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대주교는 3월 3일 추기경들 앞에 2번 출석하였고, 샤리에르 주교의 후임자인 프리부르 교구의 마미에 주교는 1975년 5월 6일 어떠한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성비오10세회를 불법 탄압하였다. 선고는 ‘그 즉시 발효’되었고, 이는 학기가 끝나기 두 달 전에 104명의 신학생과 13명의 교수와 운영진이 버림받는 것이었다. 때는 ‘화해의 해’의 5월 8일이었다. 대주교는 이 결정에 항고하면서, 성년에 모든 신학교의 구성원들을 이끌고 로마 순례에 나섰다.
- 1976년 동안 ‘강철주교(대주교의 별칭)’의 조용한 저항에 직면하여, 좀 더 근본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빌로 추기경은 대주교의 항고를 불법 기각했다. 교황청의 국무원장은 전 세계의 주교회의에 성비오10세회의 교구 입적 후보자를 부인하기 위한 지역 주교를 초청해달라고 서한을 보냈다. 마침내 르페브르 대주교는 사제서품을 시행할 경우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의 핵심은 새미사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모든 것, 즉 공의회가 내린 결정,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개혁을 분명히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은 대주교가 새미사를 함으로써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 그 이후 이른 바 ‘무더운 여름’이라 불리는1976년 여름이 시작 되었다. 대주교는 12명의 사제서품을 행한 후 ‘성무집행 정지처분(성사집행이나 관할권 행사 등을 금지시키는 징계)’에 처해졌다. 대주교는 이 제재에 대하여 다소 익살스럽게 “이제 새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군.”라고 했다. 그 후 릴에서의 미사(1만 명의 신자들이 전통미사에 참례)가 있었고 가톨릭 교의에 관한 그의 강론은 신문의 1면을 장식하였다. 이렇게 고난에 찬 출발을 한 후에, 대주교는 에콘 신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1977년 개학 때에는 교수진을 전부 성비오10세회 회원으로 구성하였다.
- 성비오10세회는 지속된다
- 1975년에 아펜젤 주(州) 바이스바트에서 독일어권의 신학교를 세웠고 슈밋버거 신부가 교장을 맡게 된다.
- 1977년 10월에 성비오10세회는 사제 40명, 신학생 150명, 20개의 가옥과 3개의 신학교(에콘, 바이스바트, 아마다)를 보유하게 된다.
- 1978년에 바이스바트 신학교는 독일 자이츠코펜으로 이전하게 된다.
- 1979년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신학교가 설립되어 12명의 신학생들이 입학한다. 아마다 신학교는 뉴욕에서 100마일 거리에 있는 코네티컷 릿지필드로 이전하게 된다.
- 이때에 대주교는 교장직을 내려놓고 티시에 드 말레르 신부가 후임 교장이 된다. 대주교는 솔뤠르 주(州) 리켄바흐로 거처를 옮긴다. 1976년에 대주교에게 내려진 성무집행 정지 처분으로 인해 로마와의 접촉이 끝나지는 않았다.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면서, ‘전통의 빛 안에서의 공의회’라는 공식을 제안했다. 아마도 교황은 추기경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에 대하여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 성비오10세회의 확산 (성교회 안의 스캔들과의 싸움)
- 1983년 6월, 대주교는 사제서품 강론에서 슈밋버거 신부가 성비오10세회 총장을 맡는다고 선언한다.
- 1983년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초래한 추문에 직면하여 르페브르 대주교와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는 1983년 11월 1일자 공개서한을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낸다. 이들은 성 베드로에 대한 성 바오로의 저항 정신(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에서 이 일을 행했다.
- 1985년 《혼란스러워 하는 가톨릭인들에 보내는 공개서한》이 출판된다. 대주교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언어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에 대하여 그가 저항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1986년은 아씨지의 해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중대한 행위(이방종교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각자 거짓된 신들에게 기도하는 자리를 마련한 아씨지에서의 종교간 화합을 의미함)가 있었다. 같은 해 12월 2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는 이에 반대했다. 에콘 신학교는 신학생이 너무 많아 프랑스 플라비뉘에서 새 신학교가 개교한다. 그해 성비오10세회는 가봉, 칠레, 뉴질랜드,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 짐바브웨, 인도에 진출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그 세를 넓혀간다.
- 주교서임
- 1987년 3월에, 성비오10세회는 전 세계 모든 대륙에 존재하게 된다. 1986년 아씨지에서 이방종교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종교간 화합하는 등, 로마가 행하는 배교가 절정에 이르게 되자, 대주교는 1987년 사제서품식에서 천주께서 요청 하신다면 성비오10세회의 과업이 계속되도록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주교들을 서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 이로 인해 로마는 가뇽 추기경과 몬시뇰 페를을 성비오10세회에 파견하고 로마가 가한 제재와 이미 행해진 탄압의 불법성을 인정하게 이른다. 가뇽 추기경은 12월 8일 2)'성무집행이 정지된 대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했다. 그 결과 대주교는 받아들일 만한 조정을 기대하면서 주교서임 날짜를 늦추었다. 가뇽 추기경의 보고서는 호의적이었으나 발표를 금지 당했고 오늘날까지 출간되지 않고 있다.
- 1988년 5월 그럼에도 르페브르 대주교는 로마에서 가진 새로운 회동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교의에 관한 원칙에 서명하고 다음날, 대주교는 주교성성 및 성전(聖傳)을 담당할 성성(聖省)에 관한 새로운 보증을 요구했으나 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거절당했다.
- 1988년 6월에 4인의 주교를 서임하기로 결정한다. 주교서임은 교회가 확립한 필요성을 가지는 경우에 의해 정당화되며, 교황 측에서 주교서임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으로 간주된다. 사실, 교황은 관례적으로 교회에 공동선을 위한 필요수단을 부여하려고 하였음이 틀림없다.

- 1988년 3월, 여섯 번째 신학교(성십자가 신학교)가 호주에서 설립된다. 같은 해 9월 북미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는 예전에 도미니코회의 수련원으로 쓰였던 아름다움 건물이 있는 위노나로 이전한다.
- 1989년 11월 19일, 대주교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르부르제에서 23,000명의 신자들 앞에서 그의 사제서품 60주년 미사를 집전한다.
- 1990년 성비오10세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이한다.
- 르페브르 대주교와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의 서거, 주교서임
- 1991년 3월 25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주님 안에서 선종했다. 가뇽 추기경은 에콘을 방문해서 대주교 무덤 앞에서 “감사합니다, 예하.”라고 속삭였다.
- 1992년 티시에 드 말레르 주교가 윌리암슨 주교와 갈라레타 주교 공동으로 브라질 캄포스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회의 랑겔 주교를 성성 한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회는 신앙의 열렬한 수호자이신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의 신자들이 2000년 교회의 성전(聖傳)에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해 설립했다.
- 1992년 성비오10세회는 필리핀에 지부를 두게 되며, 아울러 공산주의 붕괴 후에 시작한 동유럽 국가에서의 종도직은 발전하게 된다.
- 1993년 3월 25일 슐로스 슈반데크에서 첫 번째 미사가 집전되었고 이곳에서 성비오10세회의 본부 건물과 오블라테 수녀원의 수련원을 열었는데, 이후 성소지망자가 너무 많아 발레의 살반으로 이주하게 된다.
- 오늘의 성비오10세회
- 1994년 7월 펠레 주교가 슈밋버거 신부에 이어 현재 유지하고 있는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 2000년 희년 총장은 교황 성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모든 사제형제회와 그리고 신학생들을 이끌고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전통 라틴어 미사를 자유롭게 드리라는 자의교서 “숨모룸 폰티피쿰 (Summorum pontificorum)”을 발표하였다.
- 2009년 베네딕토 16세는 성비오10세회의 4명의 주교에 대한 ‘파문’을 철회했다.

- 이처럼 성비오10세회의 종도직 양성은 설립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3)성전(聖傳)은 설립자 르페브르 대주교가 의도하고 수행한 ‘생존작전’ 덕분에 온전히 퍼져나가고 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제, 수도자, 신자 수는 '반역’ 주교의 선택이 유효하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성비오10세회의 전 세계적인 확산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영혼들이 필요로 함을 나타내고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파괴적인 효과로 인해 신앙의 열정이 무기력해지고 사그라지는 반면에, ‘성전(聖傳)의 존재’는 실로 성공하고 있다.

- 1) 태도 : 이들 두 고위성직자는 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거리낌 없이 “기혼남성을 사
- 제서품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영원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우리 주님의 부활을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구세주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 육신의 부활을 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2) '성무집행 정지처분을 받은 사람'이 집전하는 성사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
- 어 있음을 상기해 보자. 추기경이 제의를 입고 제단에서 미사에 공식 참여한 사실은 최소한 이전에 가해진 제재의 유효성에 강한 의문을 갖게 한다.
- 3) ‘성전(聖傳)’이란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먼저 예
- 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한 계시의 두 원천(성전(聖傳)과 성서) 중 하나이며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이들 계시의 두 원천은 동등하게 존귀한 바. 성전(聖傳)이 먼저 존재하였고 성서는 성전(聖傳)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의미에서, 성전(聖傳)은 대문자 T(영단어 Tradition의 'T')로 표기된다, 둘째, ‘성전(聖傳, tradtion)’은 종도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와 모든 시대에 전해진 전통을 의미하는 바, 첫 번째 의미의 ‘성전(聖傳, Tradition)’과 똑같이 존귀한 것은 아니지만 존경을 받아야 하는 바, 필요가 없거나 잘못 이해될 경우 권한을 가진 이들의 판단에 따라 특정 상황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전(聖傳)’은 교회 첫 번째 의미의 ‘성전(聖傳, Tradition)’과 두 번째 의미의 ‘성전(聖傳, Tradition)’의 영향 하에 수세기 동안 형성된 교회생활의 다양한 요소들을 일컫는 바, 성신의 은총이 지니는 권능으로서 이 신앙과 거룩한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게 하는 계시로부터 생명력을 얻는 교회의 신앙을 반영한다.
이들 요소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거나 변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3가지 의미의 ‘성전(聖傳, Tradition)’은 존경과 주의를 갖고 다루어져야만 하는 바, 왜냐하면 시대의 신앙을 나타내고 분별없이 ‘성전(聖傳)’을 제거하거나 변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앙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성전(聖傳, Tradition)’은 ‘성전(聖傳, Tradition)’과 함께 하거나 종종 홀로 ‘성전(聖傳)’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현대주의가 싼 값에 팔아치운 보화의 상실과 화해할 수 없거나 현대주의로 인한 교의와 신앙심의 와해를 수용할 수 없는 이들을 특정하는데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