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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0.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세계종교통합)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9-30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10.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세계종교통합)

10. Ecumenism

 


  요즘과 같은 개념의 혼란기에는(일부 어떤 가톨릭 신자들은 안정되어 있어 보이지만) 신앙이 특히나 위태로워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기 때문에 더 그렇다. 사전을 찾아보면, 스위스 로잔느(Lausanne)에서 1927년의 의회기에 나타난 어휘는 가톨릭인들을 긴장시키고있으니, “에큐메니즘: 모든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교회로 재 일치시키는 운동.” 모순된 원칙은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법이다. 오류를 받아드림과 동시에 진리 전체 또는 그 일부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진리와 오류가 서로 결합되어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에큐메니즘은 그 자체가 단죄의 대상이다.


  지난번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즘에 관련된 표현이 설교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을 정도로 대유행이다. 보편적인 에큐메니즘이나, 실험적 에큐메니즘이나, 그리고 그 밖의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다 남발하여 변화와 절충주의에 우호적인 표현과 반가움 등을 드러낸다.


  종교적 용어로 쓰이는 경우, 에큐메니즘은 최근 비그리스도교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다. 프랑스 서부 지역의 한 신문은 그런 혁신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한 사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셸부르(Cherbourg) 근처에 있는 어느 작은 본당의 가톨릭 교구민들은 건물을 짓는 일을 하려고 건너온 회교도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지내도록 돌봐주었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행위를 했다 해서 그들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회교도들이 라마단(Ramadan)의 단식을 행해야겠다면서 별도의 장소를 요구하니, 가톨릭인들은 자기네 교회 지하실을 제공했다. 그 후 코란(Koran)식 학교가 개교했다. 2년 후에는 가톨릭인들이 회교도들을 초청하여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는데, 회교신자들과 함께 ‘코란에서 발췌한 인용문과 복음에서 발췌한 운문을 가지고 만든 공동 기도문을 사용했다’. 잘못된 사랑이 신자들을 잘못 인도하여 오류로 뒤섞인 관계를 만든 것이다.


  릴(Lille)에서는 회교도에게 도미니꼬회원(Dominican)들이 경당(經堂)을 제공하고 결국에는 회교 사원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베르사이유(Versailles)에 있는 교회에서는 “회교도 예배당 매입”을 목적으로 헌금을 모았다. 루베(Roubaix)와 마르세이유(Marseilles)의 경당 두 곳도 아르쟝터이(Argenteuil)의 교회와 함께 양도되었다. 가톨릭인들이 그리스도교 최악의 원수(회교도)가 되어 자기 돈을 모하메드에게 기부하는 것이다. 프랑스에는 회교 사원이 400곳이 넘으며, 많은 경우에 회교도를 위하여 가톨릭인들이 건축 기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교회에서는 어떤 종교에 속한 사람이든지 차별 없이 시민권을 누린다. 티벳(Tibetan) 승려들이 자기네 예식복을 입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데서 한 프랑스 추기경이 미사를 드렸는데, 미사 해설자가 그들 앞에서 인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번 성체예식에는 불교 승려들도 함께 참여하게 되겠습니다.” 렌느(Rennes)의 교회에서는 부처 숭배의식이 행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20명의 수사들이 불교도가 지도하는 선(禪)에 엄숙히 입문하였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종교혼합주의에 관련된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인용할 수 있다. 그러한 단체가 팽창하고 발전하며 그 운동이 생성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모든 영성을 혼합하기’를 추구하는 데 합류하고 싶어 하는 성직자들, 즉 자청해서 그 지도자가 되려는 성직자를 발굴하는 데 열심인 것 같다. 또한 마르세유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Notre Dame de la Garde)를 그리스도인, 회교도 및 유데아 교도를 위한 일신론자(一神論者)의 경배장소로 바꾸려 했던 프로젝트들이 많이 있는데 이 얼마나 경악할 일인가? 다른 프로젝트와는 달리 그나마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프로젝트가 몇몇 평신도 그룹에 의해 실행되지 못하고 중단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횡행하는 엄격한 의미의 에큐메니즘으로 말미암아 개신교와 함께 거행하는 성체예식이 성행하게 되었으니,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경우가 그 중 하나에 해당된다. 성공회 신자들이 사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에 초대되어 “성체성사적인 친교”를 거행하기도 했다. 사르트르, 스트라스부르,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도 오로지 성 비오 5세(Saint Pius Ⅴ)께서 성문화한 예식에 의한 미사성제만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스캔들거리가 되는 예식을 교회 당국이 너그럽게 봐주는 것을 보면, 가톨릭인이 느끼는 혼란은 어떤 걸까? 모든 종교가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불교도이건, 개신교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인가? 결국, 가톨릭 신자는 참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신앙을 잃을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구현되고 있다. 저들은 교회를 자연법에 종속시키려 한다. 저들은 교회를 다른 종교와 같은 동등한 수준에 두고 싶어 한다.


 저들(사제, 신학생 및 신학교 교수)은 가톨릭교회가 오직 유일한 교회이며, 가톨릭교회만이 그 안에 진리가 있고, 인간을 올바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교회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영적(靈的)인 누룩이지만 다른 종교와 같든지, 어쩌면.......다른 종교들보다 조금 더 나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에게 여하간 설득할려고 하면, 그제서야 간혹 인심 쓰듯이 교회가 우월하다는 주장에 수긍하는 척 하지만 그 정도가 지극히 미미하기만 한 실정이다.


  그런 식으로라고 한다면, 교회는 단지 유용하기만 할 뿐이며 절체절명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즉, 구원의 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가톨릭)교회는 그 많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개념은 가톨릭 신덕도리와는 근본적으로 상반(相反)된다. 교회가 구원의 보고(寶庫)인 이상, 두려워 말고 그것을 확언해야 할 것이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현대의 사조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이 신덕도리가 지나치게 가혹해 보이는 것이며 이제는 이말은 효력을 잃고 그 의미마저 완전히 사라졌노라고 믿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바뀐 것은 없으니, 그 영역에서는 그 진리가 바뀔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여러 종류의 교회를 세우시지 않고 단 하나만 세우셨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십자가 하나 뿐으로 그 십자가는 천주교회(가톨릭교회)에만 주어졌다. 다른 종교에는 십자가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비스런 정배(正配)인 교회에 온갖 성총을 다 주셨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에, 인류역사에 어떤 은총도 뿌려지지 않는다.


  이는 개신교, 회교도, 불교도 또는 정령 숭배자는 무조건 구원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두 번째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한 성 치쁘리아노(St. Cyprian)의 신앙 고백문을 두고 편협하다고 해석하는 이들은, ‘죄 사하는 성세 하나를 믿으며’라는 신경(Creed)도 역시 부인(否認)하는 것이거니와 성세(聖洗)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세를 받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수세(水洗), 혈세(血洗-아직 예비신자인 동안에 신앙을 고백한 순교자들의 성세), 그리고 화세(火洗)가 그것이다.


  화세는 명시적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지내던 시절에 우리 예비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로 와서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 신부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제가 죽게 되면 지옥에 갈게 분명하니, 바로 지금 성세성사를 주십시오.”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아니오, 그대 양심에 대죄(大罪)가 없고 성세 받기를 원하면 그대 안에는 이미 성총이 있는 것이오.”


  교회의 교리는 또한 암묵적인 화세도 인정한다. 이는 천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천주께서는 전지(全知)하셔서 인간 모두를 아시는 고로 개신교인, 회교도, 불교도 그리고 온 인류 가운데 누가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다 아신다. 비록 본인이 깨닫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는 성세의 성총을 유효하게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교회의 일부가 된다.


  자기 종교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오류다. 자기 종교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되는 것이지, 자기 종교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에는 불교도의 교회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교회도 없다. 이는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진리인 것을 어찌 하리요. 내가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천주 성자이신 우리 주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을. 사제인 우리는 그저 진리만을 증언해야 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교 문화가 퍼지지 않은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간난궁고(艱難窮苦)를 겪는 대가로 자신의 소망에 따른 화세를 받게 된다! 오류는 성신을 대상으로 하는 방해물이다. 교회가 어찌하여 온 세상에 항상 전교자를 파견해야 했으며, 어찌하여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순교를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아무 종교에 속해 있어도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무슨 이유로 바다를 건널 것이며, 어째서 자신의 생명을 악천후에, 모진 생활에, 질병에 그리고 빨리 닥쳐올 죽음에 부치겠는가?


 성 스테파노(St. Stephen)의 순교 -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첫 번째 순교자, 그래서 그의 축일은 성탄절 다음 날인 12월 26일- 가 있고 나서 종도들은 지중해 연안 국가로 퍼져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프리기아의 대지의 여신(Cybele)을 숭배함으로써 또는 율리시스(Eleusis)의 제전을 통해서라도 구원될 수 있다면 그 분들이 과연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 주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보천하(普天下)에 가서 만민(萬民)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요즘 들어서 각자 천주께로 향하는 길을 찾기는 찾되 ‘문화 환경’상 우세한 믿음에 따르게 하라고 하니 경악할 일이다. 어떤 주교는 어린 회교도를 개종시키려는 사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니다, 훌륭한 회교도가 되라고 가르쳐라. 그 편이 가톨릭 신자가 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공의회가 있기 전에 떼에제(Taize) 공동체가 자기네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 신자가 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교회당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기다려라. 공의회 이후가 되면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다리가 놓일 것이다.” 보통 허락된 순간에만 성총이 주어지며 그런 성총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임으로, 그렇게 답한 이들은 천주대전에서 엄청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재 떼에제 단원(團員)은 자기네를 방문하는 청년들의 마음속에 혼란만을 주는 상태로서 아직도 교회의 밖에 있다.


  미국,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서 1년에 170,000명에 달했던 개종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교회의 잘못된 해석과 곧 이어서 거론하게 될 공의회에 의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선언문으로 인하여 전교(傳敎)의 정신이 점차로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