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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06. 새 양식의 성세, 혼배, 고해, 종부성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8-03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6. 새로운 양식의 성세, 혼배, 고해 및 종부성사

6. The New Forms of Baptism, Marriage, Penance and Extreme Unction.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중요한 인생사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가톨릭 신자를 면밀히 살펴보면, “성세성사란 무엇인가?” 라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조차 그들이 대답을 잘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니, 이러한 질문정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있었고 또한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성세성사의 첫 번째 효능은 사람이 원죄에서 구원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는 딸에게 전해 주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디서도 그러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간소화된 교회 예식에서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성세성사를 받은 이가 죄는 일생 동안에 범하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거론하지, 원죄를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타고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후 계속해서 성세성사란 우리를 천주께 결합시키는 것, 오히려 공동체 구성원이 되게 하는 성사로 나타난다. 여러 곳에서 일 단계 예식으로 행하는 ‘환영 예식’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전국사목전례센터(National Center of Pastoral Liturgy)에서 발행한 인쇄물을 보면, 성세성사가 단계적으로 무척이나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분명, 어느 개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사후(事後) 성세성사’라고 부르는데, 환영식이 있고서 ‘중간 단계’와 ‘끝 부분’에 다다른다. 어린이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선택할 능력이 생기면 사용되는 용어에 따라서 성사가 거행되거나 혹은 거행되지 않거나 하는데, 결국 이 성세성사는 나이가 제법 먹은 18세 혹은 더 고령인 때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새 교회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어느 교수는 신학에서 신덕도리를 담당했는데, 자신의 신앙과 종교문화를 증언할 수 있다고 믿는 크리스챤과 겨우 자기 자녀에게 성세성사를 베풀어 달라고 청할 수준밖에 안 되는 신앙에 의존하는 이들(전체 중에서 3/4이상)을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예비 모임 기간에 그런 ‘대다수’ 수준에 처한 그리스도인을 발견하게 되면 저들을 설득해서 ‘환영 예식’의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문화적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다.


 솜므(Somme)구의 한 본당 사제가 최근에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과정에 두 어린이를 등록시키는 필요한 성세 증명서를 요청하자, 가족의 원적(原籍) 교구에서 증명서를 보내 왔는데, 어린이 중 한 명은 이미 성세를 받았으나 다른 한 명은 부모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성세성사를 받지 않았음을 알았다. 앞에서 언급한 신앙생활에서 비롯된 현상이래야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출석자가 바른 신앙을 취하여 참된 성사를 이루어야 하는데, 실제 저들이 베푸는 것은 성세의 빈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황당하지 않는가? 또한 교구 잡지에 일반적으로 익명으로 하는 데, 세례명으로 서명한 것을, 투서 또는 항의서한 형식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게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중 하나를 보면, “성세성사는 원죄를 기적적으로 씻어내는 마술 같은 신비로운 의식이 아니다. 구원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천주 당신의 사랑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 또는 아무 조건 없이 인류 전체를 택하셨다. 우리에게 있어 성세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생활을 바꾸기로 하는 것이니, 아무도 대신해 주지 못하는 개인적인 서약이요, 예비교육 등을 수반하는 자의적(恣意的)인 결정이다”라고 앨런(Alan)과 애벌린(Evelyn)은 설명한다.


 이 짧은 글 속에 얼마나 놀라운 오류가 들어있는지 보라! 저들은 또 하나의 수단인 유아영세를 주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도록 유인한다. 4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께서 말씀하시길 “유아세례를 베푸는 관습은 최근에 혁신한 것이 아닌, 종도로조차 전해 내려오던 것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관습은 저 홀로 그리고 성문화된 문서가 없더라도 확고한 진리의 규범을 이룬다”. 이는 처음부터 교회 당국의 가르침에 도전한 저항자(프로테스탄트)와 그 맥을 같이 한다. 251년에는 카르타고(Carthage)공의회에서 “태어난 지 8일이 되기 전이라도” 유아에게 성세성사를 베풀어야 한다고 규정하였고, 신앙교리성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은 Pastoralis actio (1980년 11월 21일 훈령)에서 ‘아주 오래 된 전통의 규범’에 근거한 의무라고 상기(想起)시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어떤 이가 신생아로 하여금 성총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할 경우에 있어서 천주께서 주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려면 이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부모라면 자기 아이가 18살이 될 때까지 식이요법 또는 꼭 필요한 외과 수술을 받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미루겠는가. 초자연적인 질서 안에서의 의무란 훨씬 더 중대한 까닭이기에 유아가 직접 서약을 하지 못하더라도 성사를 받게 해야 할 책임을 맡은 신자인 여러분, 유아가 성총지위를 누리는 데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유아에게서 천당의 영원한 생명을 박탈한 것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우리 주께서 직접 뚜렷한 어조로 “그 누구도도 만일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능히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렇듯이 괴상한 사목활동의 결과가 나타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리 교구의 경우, 1965년에는 두 아이 중 한 명꼴로 세례를 받았는데, 1976년에는 네 아이 중 한 명꼴로 세례를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과는 별도로 한 변두리 교구의 성직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1965년에는 450회, 1976년에는 150회의 성세성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프랑스 전역에서 성세성사의 횟수가 지속적으로 감소된 것이다.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성세성사 횟수는 596,673에서 530,385까지 줄어든 반면 인구는 같은 기간에 300만 명도 더 늘었다.


 이 모두가 성세성사의 정의를 왜곡시킨 결과가 아니고 그 무엇이랴? 성세성사로써 원죄가 씻긴다는 내용을 말하지 않게 되자 곧바로 신자들은 “성세성사가 무엇인가?” 그리고 “성세성사의 유익한 점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이 정도도 모른다는 것은 방금 언급한 논의에 대하여 전혀 긴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인식함에 따라 결국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하는 일을 단지 사춘기 때에 자녀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정당 또는 어느 단체에 가입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혼인에 대해서도 의문이 같은 방법으로 제기된다. 혼인에서 제1의 목적이 자녀출산이며 사랑의 결합이란 2차적인 목적이라고 정의(定義)해 왔다. 2차 바티칸공의회 시대인 지금은 제2의 정의를 받아드리려 애쓰고 있으며 최우선의 목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두 가지 목적이 동등하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를 촉발케 한 이는 수에넨(Suenens)추기경이었으며, 도미니꼬회 총장인 브라운(Brown)추기경이 일어나서 “조심하시오! 조심하시오! 제2의 정의를 받아들이면 교회 전통과는 완전히 정 반대로 나아가 혼인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교회의 전통적인 정의를 바꿀 권한이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브라운 추기경이 참고문헌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경고를 옹호한 다음에, 성 베드로 성전의 본당 회중석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수에넨 추기경을 교황이 제지하자 그는 자신이 사용했던 용어를 완화시키고 이를 바꾸기까지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목 칙령(Pastoral Constitution) Gaudium et Spes에는 모호한 글귀가 포함되어 있다. 그 글귀를 보면 ‘혼배의 다른 목표를 축소나 최소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을 강조한다.


 라틴어인 post habere는 ‘혼배의 다른 목적을 제2의 위치에 두지 않고’ ‘서로 같은 수준에 있는’ 의미로서 번역이 가능한 단어다. 후자(後者)의 의미야말로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인즉, 혼배에 관하여 거론되는 것은 모두 수에넨 추기경이 표현한 그릇된 관념 (즉, 그대로 말하자면 ‘성욕’ )이 부부간의 사랑이 혼배의 목표 중에서 제1의 위치를 차지하는 관념으로 귀착된다. 결국 성욕에서 기인(起因)한 것이면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는 것이니, 피임도, 가족계획, 마침내 낙태도 말이다!


 한번 악(惡)하게 정의(定義)하기 시작하면 전체가 무질서에 빠져드는 법이다. 성 교회는 전통적인 전례에서 사제에게 “주여, 당신의 선량하심을 인하여 도우시니 인종이 번성하도록 제도를 세우셨나이다....... ” 말하게 한다. 교회는 에페소인에게 보내는 성 바오로의 서간경에서 글귀를 발췌하여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결합된 관계의 모상으로써 혼배를 이룬 부부의 의무를 나타냈다.


 요즘에는 성경의 서간경(書簡經)에서 글귀를 뽑지도 않고 오히려 그 서간경 대신 이교(異敎)적인 글귀로 바꿔치고도 그와 동시에 혼배성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독서를 복음에서 채택하여 자기들을 위해 짜 맞춘 미사를 드리는 일이 매우 흔하다. 사제가 훈화할 경우에는 서로 복종할 필요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 안 할려고 조심을 하는데 이는 교회가 금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까 걱정되고 또한 회중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걱정해서란다.


 성세성사처럼 혼인에 있어서도 실험적인 혼인 또는 가톨릭 신자들이 추문에 빠지게 하는 비 성사적인 혼인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주교단(主敎團)에서 묵인하는 그러한 실험들은 공식 기구에서 정하고 그 다음 노선이 유발되고 교구 차원에서 이를 관리하도록 권한다. 장바르 센터(Jean-Bart Center)에서 제시된 양식은 이를 시행하는 방법 몇 가지를 보여 주니, 다음은 그중 일부다.


 다음은 본문에서 발췌한 독서다, “본질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성 베드로의 서간) 노동과 노동자들의 결합을 상징하는 손을 잡는 예식 외에는 서약의 교환이 없다. (축성 안된)반지교환이 침묵 가운데 행해진다. 로버트의 저서를 참조하는데, 용접과 그 결합이 내용이다(그는 배관공이기 때문이다) 입맞춤. 모든 신자들이 주의 기도 합송. 성모송. 신혼부부가 성모상에 꽃다발을 바친다.


  맨 끝의 두 기도문을 빼면, 초자연적인 것이 아무리 봐도 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의식으로 바뀌면, 우리 주께서 혼배성사를 제정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몇 해 전에 우리는 소네르와르(Saone-et-Loire)에서 행한 전례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젊은 커플에게 이르기를, 나중에 영구(永久)한 혼인으로 성사(成事)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그 ‘환영의 예식’을 합리화했다고 한다. 200회의 모의(模擬) 결혼이 시행한 지 2년 되었어도 자기 것이 정식 혼인이 되게끔 바로 잡으러 온 커플이 한 쌍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 사건은 교구의 사제가 실질적으로 공인한 상태로써, 2년도 더 되는 기간을 실제로 강복 받지 못했다면 이는 단지 내연 관계에 불과하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현장 조사를 한 것을 보면 파리 소재 본당 중 23%가 커플에게 비 성사적인 결혼식을 사전(事前)에 올려 주었는데, 두 사람 다 비신자가 아닌 경우(둘 중의 한 사람이 신자이거나 둘 다 신자인 경우를 말함)가 아니면, 그중 한 사람이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서 가족이나 커플 당사자들을 만족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가톨릭인이라면 그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를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은 채 진행한다. 혼인한 부부의 편에서 볼 것 같으면, 자기들은 교회에 다녔고 동료들도 똑같은 길을 따르고 있음을 보고는 자기네도 틀림없이 정식 부부로서의 자격이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신자가 잘못 인도되고 나면 별일은 아닌지 궁금해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관심이 뒤를 잇고 간단한 호적 등기소 결혼을 시작하여 미성년자 동거(아주 많은 부모들이 ‘이해 납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리고 드디어 자유 결혼에 이르기까지 어떤 논의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전반적인 탈 그리스도교화에 직면한 것이다. 최소한 자녀를 낳을 것에 동의하는 경우 각 커플에게는 혼배성사에서 나오는 성총, 말하자면 자녀를 양육할 수 있게 해 주는 성총이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축성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대의 붕괴는 경제 및 사회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할 정도로까지 심해졌는데, 최근의 한 보고서를 보면 세속 사회마저 그런 가정 또는 의사(擬似)가정의 불안정성의 결과, 가정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부성사(역자 주: 임종을 앞둔 이에게 마지막으로 행하는 성사)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되었다. 종부성사는 이제 병자 혹은 병약자를 위한 성사가 아니고 그냥 노인을 위한 성사가 되었다. 어떤 사제들은 죽음에 임박했다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그저 연금을 받을 자격만 되면 종부성사를 행한다.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사람을 준비시켜서 죽기 전의 그의 죄과를 씻어냄으로써 영혼을 천주와 결합시키는 마지막 성사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나에게는 파리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배부된 것으로 종부성사 날짜를 환기시키는 유인물이 있다. “아직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한 것, 병자의 성사가 성체 예식 동안에 전 그리스도인 공동체 앞에서 거행됨. 날짜: 일요일, 11시 미사에서.” 이런 식의 기름 바르는 예식은 무효다.


  집단주의 정신이 고해 예식에서도 이 같은 풍조를 촉발시켰다(공동고해). 고해성사에는 각 개인의 개별적인 속성만이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은 정의(定義) 및 그 본질을 따르자면, 고해성사는 공정 행위, 즉 재판이다. 재판은 원인을 검증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고, 각 사안을 제대로 판별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들어야 하며 그 후 죄를 감면해 주든지 존속시키든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 4월 1일 프랑스 주교들에게 이르기를, 사죄경이 개별적으로 베풀어지는 개별 고명, 즉 한 사람씩 일일이 고해소에서 죄를 고(告)하는 것이야말로 ‘신덕도리에 관련된 의식의 필수조건’이라면서 그 점을 여러 차례 꼭꼭 집어서 지적한 바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대세계의 흐름에 발을 맞춰야 한다면서 교회법을 더 완화하고 풀어주면서까지 고해 예식을 그렇게 정당화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이는 단순한 규율의 문제가 아니다.


  전에는 예외가 하나 있었다. 배의 조난사고, 전쟁, 기타 등등과 같은 경우, 공동 사죄로 박식한 이들이 그 가치를 논하는 사죄가 그것이다. 예외 없는 규정은 없다.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가 여러 경우에 관하여 표명한 교황청 공보(公報)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예외적인 공동 사죄의 성격’, ‘매우 중대하게 특별한 상황’, ‘극히 예외적인 특성’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1년에 두세 번 이상 천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놓으려는 신자들의 숫자가 매우 적음으로 인하여 어느 교구에서는 그런 유형의 예식(공동 고백)이 흔해졌다고까지는 말을 못해도 보편화됐다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런 자들 마음속에서는 죄에 대한 관념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미 예상했던 것과 같이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신자들에게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는 사제는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신자가 말하길, 파리의 많은 교회 중에서 ‘당번인 사제’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고해하러 가면 축하를 받거나 혹은 고해자(告解者)를 만난 것에 매우 놀란 사제가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는 일이 잦다고 한다.


  ‘생기를 불어넣는 자’의 독창성에 의존하는 축하식에는 가창 말고도 레코드 연주가 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의 전례가 있고 회중이 화답하는 기도문 중 도문(호칭기도), “주여, 우리를 긍련히 여기소서” 또는 그밖에 공동의 양심성찰과 같은 것이 뒤를 잇는다.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한 사죄경을 한꺼번에 해주는 것에 앞서 “나 전능하신 천주께 고하오니”를 염하는데, 그러다 보니 회중 모두에게 문제 하나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참석자도 똑같이 사죄경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루르드에서 그런 예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배부된 두 통의 유인물을 보면 조직원에게 요구되는 내용이 있다. “사죄경을 받고자 한다면 손을 물속에 담그고 자기를 향해 십자성호를 그린다.” 끝으로 “샘물로 십자가 표시를 받은 사람들 위에 사제는 손을 얹는다. 사제가 드리는 기도에다가 자신을 결합시켜서 천주님으로부터 오는 용서를 받으라.”


  영국의 가톨릭 신문인 더 유니버스(The Universe)는 몇 해 전에 두 주교가 시작한 것으로, 신앙생활을 그만둔 지 오래 되는 신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운동에 지지성명을 냈다. 주교들이 제작한 호소문은 가출 청소년의 가족이 작성한 공식 벽보와 닮은 점이 있었다. “000야, 제발 집으로 돌아와 다오. 너를 야단치지 않을 테니.” 그리고는 장래의 탕자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사순절 동안에 축하하고자 주교들은 너희를 초대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자녀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조건 또 아무런 요구 사항 없이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베푼다. 교회는 그들을 받아들이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바다. 여러 해 동안의 이별이 있은 후에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고해성사를 베풀어 줄 수는 없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니다..... ”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해당 교구(지금 이 곳이 주어진 그 때요, 그 날이라)에서 주교가 집전하는 전교 미사 때 여러분을 초대하니, 참석하는 이는 누구나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될 것. 그 때에는 따로 고해성사를 받으러 갈 필요가 없음. 자기 죄를 통회하고 천주께 돌아오기를 소망하고 울타리 안으로 돌아와 다시 환영받고 나서 나중에 자기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 어쨌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 팔 안으로 모아들이시어 부드럽게 감싸 안도록 해 드리기만 하면 된다. 주교가 참석하며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허락될 관대한 회개의 행위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고 그리고는 즉시 영성체할 수 있고..... ”


  격월제로 발행되는 잡지인 루르드의 저널 오브 더 그로또(Journal of the Grotto)는 ‘공동사죄(공동고백): 선(先) 영성체, 후(後) 고해’라는 머릿기사로 된 희한한 사목서한을 재발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독자는 그것에 영감을 준 복음 정신은 물론 신자들의 현 상황에 대한 목자다운 이해를 깊이 통감할지어다.”


  어떤 결과가 났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오래 동안 수계범절을 지키지 않고 있다가 대다수가 어쩌면 대죄 상태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게 해 주겠다는 보장이... 사목상 필요성이 교리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것인가? 단언하건대 절대로 아니다. 신성 모독을 범할 것이 뻔한 회두를 어떻게 그토록 가볍게 여길 수 있으며 항구한 회두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여하간 공의회 이전에는, 그리고 ‘대환영의’ 사목 방법을 쓰기 전에는 영국에서만 1년에 14만 내지 15만 명의 회두자가 있었다. 이제는 약 5,000명으로 뚝 떨어졌다. 열매로서 나무를 알 것이니.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도 프랑스처럼 혼란을 겪고 있다. 자기 주교의 조언에 따라 죄인이나 냉담자가 공동 사죄를 받겠다고 이런 환경의 거룩한 식탁에 마구 참석해도 된다면, 그가 조금 지각 있는 사람인지라 스스로 그것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여길 경우에는 이토록 가볍게 취급되는 성사가 과연 유효할까? 의심이 들어서 신뢰를 잃게 되는 위험에 처하지 않겠는가?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바로 잡기’ 위한 고해성사를 소홀히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갖추어야 할 형식을 갖추지 않아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회두가 마지막 회두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신덕도리를 경시함으로 해서 생기는 현상은 이와 같다. 약간 덜 엉뚱한 방법이기는 해도 우리 교구에서 활용하는 고해 예식을 따른다면, 진정으로 죄 사함을 받음에 관하여 가톨릭 신자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신뢰할까? 개신교인처럼 의심이 들기 시작해서 내부적인 고뇌에 이르기까지 근심에 빠지고 만다. 변화를 통해 얻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음이 확실하지 않은가.


  유효성의 견지에서 악(惡)한 일이면 심리적으로도 악한 법이다. 이를테면 나중에 곧바로 직접 고해해야 한다는 조건부로, 중죄를 범한 신자들에게 공동 사죄를 해 주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신자들은 자기에게 중죄가 있다는 것을 벌써 보여주었다 해서 자신을 돌보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것은 고해소의 비밀이 침해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각자에게 해당되는 보속(補贖)을 정해 주기도 전에 공동으로 죄를 용서받고 영성체하는 신자는 더 이상 직접 참석할 필요성을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덧붙여 말해야겠다. 결국 화해의 예식이란 것이 사제에게 비밀히 죄를 고백하는 고명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명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없애버린 것이다. 고해성사는 나머지 여섯 성사(聖事)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다. 어떤 사목상의 이유로도 그것을 합리화시키지 못한다.


  성사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재료, 형상 그리고 의향이 모두 다 필요하다. 교황이라도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재료는 천주께서 정하신 것으로, 교황이라 해서 “앞으로는 유아 세례 때 주류(酒類) 혹은 우유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하지 못한다. 형상의 본질도 바꾸지 못하는 즉, 꼭 염해야 하는 경문이 있다. 예컨대 어느 누구도 “나 네게 세를 주되 천주의 이름으로 하노라”라고 외우지 못하며 “(아무) 나, 네게 세를 주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야 하노라”라고 해야 하는데, 이는 천주께서 직접 그 형식을 정하신 연고이다.


  견진성사(堅振聖事)도 함부로 취급되어 왔다. 오늘날의 신앙고백문 하나를 보면 “내가 십자의 성호로 네게 인(印)을 치니, 성신(聖神)을 받으라”이다. 그런데 거행자는 성신께서 그 성사로써 직접 내려주시는 특별한 성총을 일일이 예거하지 않으니, 그런 성사는 무효다.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고 자기 자녀들이 받은 견진성사가 과연 유효한지 의심하거나, 유효하지 않게 거행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부모들의 요구를 언제든지 내가 들어주는 이유는 이와 같다. 1975년 나한테 직접 해명을 들었던 추기경들이 이에 대해 나를 비난했고 그 후에도 나의 순례 기사가 나올 적마다 비슷한 비난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교회법이 유효한 견진성사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지 못하고 천주법에 반(反)하는 경우에는 자연적인 그리고 초자연적인 천주법이 교회실정법을 우선하는 시기에 있는 까닭에, 신자들은 적법하지 않더라도 유효한 견진성사를 받으려 한다는 점을 내가 경험한 것이다. 특별한 위기를 당하고 있으니 때에 따라 정상에서 벗어나는 태도를 취한다 해도 놀랄 것이 못된다.


 유효한 성사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바른 의향이다. 주교나 사제에게는 교회가 의도하는 대로 행하려는 의향이 있어야 한다. 교황이라도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사제의 신덕(믿음)이 꼭 필요한 요소라고는 할 수 없다. 주교나 사제에게는 신덕이 더 이상 없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의 신덕은 이보다 못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의 신덕은 매우 완전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그들이 거행하는 성사의 유효성에 대하여 직접적인 효험이 없더라도 간접적인 효험은 있을 수 있다. 교황 레오 13세가 결정하기를, 성공회식 서품에는 의향(意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무효다 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들이 신덕을 잃었기 때문으로, 그 신덕이란 천주께 대한 신덕일 뿐만 아니라 ‘나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며 종도로조차 전해 내려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를 포함하여 신경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진리에 대한 신덕이니, 성공회 신자들은 교회가 의도하는 대로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덕을 잃은 사제들도 똑같은 경우는 아닐까? 이미 트리덴틴공의회에서 규정한 정의(定義)대로 성체성사를 이루려는 원의(願意)가 더 이상 없는 사제들이 있다. “아니다”라고 그들은 말하면서 “트리덴틴공의회는 오래 전에 있었다. 그 후의 세대인 우리에게는 2차 바티칸이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이제 그것은 과거의 의미 또는 지나가 버린 결말이다. 성변화(聖變化)? 면주의 형상 안에 천주 성자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고? 요즘은 그렇지 않아!”라고 한다.


  사제가 그같이 말하니, 그가 유효한 성변화를 이루지 못할 것은 뻔하다. 이런 곳에서는 미사도 영성체도 유효성이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트리덴틴공의회에서 성체성사에 관하여 규정해 놓은 것을 믿어야한다. 누구라도 신덕도리에 관한 용어를 더 명확하게 할 수는 있어도 이를 바꾸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차 바티칸에서는 아무 것도 추가하거나 축소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한 그렇게 시행되어도 안 되는 것이었다. 성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자는 누구든지 트리덴틴공의회에 따라서 파문을 받을 것이며, 말하지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20세기 후반기를 사는 가톨릭 신자는 선조들보다도 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종교가 원하는 바는 성 교회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신학, 새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구성되는 관념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