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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04. 영원한 미사와 현대의 새미사(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6-26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4. 영원한 미사와 현대의 새미사(2)


 마르틴 루터는 제헌경(祭獻經)을 없앴는데, 그 이유는 희생이 없으니 조촐한 제물을 봉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어 판 새 미사에는 제헌경이 빠져 있거니와 그런 이름조차 없다. 새 주일미사경본에서는 ‘선물의 기도’라고 지칭한다. 쓰이는 신앙 고백문은 지상의 열매에 대한 감사를 상기(想起)시킨다. 이를 완전히 깨달으려면 ‘선물의 기도’라는 것을 “이는 내 이왕 범한 무수한 죄와, 네 성의를 거스린 많은 허물과 네 계명을 소홀히 여긴 내 모든 죄를 깁기를 위할 뿐 아니라, 또한 여기 두루 있는 모든 이를 위하며, 네 성교회의 산 이와 죽은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드리는 바로소이다”와 같이 성 교회에서 대대로 사용해 온, 희생제사에 포함되어 있는 속죄 및 화해의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신앙 고백문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작을 들어 올리면서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우리들이 네게 이 구원의 잔을 드리오며 네 너그러우심을 간구(懇求)하오니, 이 잔으로 하여금 마치 아름다운 향내와 같이 네 엄위하신 대전에 사무치게 하시어, 우리와 및 보세만민(普世萬民)의 구령(求靈)을 위하여 유익함이 되게 하소서.”


 본래의 신앙 고백문 중에서 무엇이 새 미사에 과연 남아있을까? 다음을 보면, “주여, 우주의 하느님이시여, 땅의 열매와 손으로 빚어 만든 이 빵을 주신 당신은 찬미 받으소서. 이것을 당신께 드리오니 이는 생명의 빵이 됨이로소이다.” 그리고 포도주에 대해서도 ‘영적 음료’가 됨이로소이다, 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을 조금 더 첨가시켜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것인가? “내 잘못을 씻어 주소서, 주여. 내 죄과를 없이 해 주시며,” “오늘 우리의 희생으로써 당신 대전에서 은총을 찾게 해 주소서”(??) 어떤 죄를, 어떤 희생을 말하는 것인가? 이처럼 애매한 봉헌의 선물과 속죄를 기대하는 것에서 도대체 신자들은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 뜻이 완전하고 명쾌한 원문은 제쳐놓고 도무지 이해불가하고 그 경계가 모호한 글로 다 바꿔 놓았는가? 꼭 바꿔야한다면 더 나은 것이어야 해야지 않겠는가? ‘선물의 기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니 이를 메우기라도 하듯 아주 흔한 평범한 이 글은, 루터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서서히 변화를 주려고 고민했는지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옛 미사전례를 가능한 한 많이 존속시키지만 겨우 의미만 바꾸는 정도로 제한했다. 대체로 미사는 그 외적인 모습을 유지했으며, 그 때부터 계속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신자의 의견을 받아드려서 (자기 취향에 맞게 고치는)신자들은 변화의 정도가 극히 미미한 모양새와 이전과 거의 비슷한 양식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개신교처럼)성가 및 기도를 큰 소리로 드리게 해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만드니, 예배를 드리는 문제에 접할 때에 자기들이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고 그 후 라틴어는 아주 서서히 독일어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이상의 것을 보면서도 중요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루터는 또 ‘중얼거림 투성이의 천주교 관습’이라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새 성가를 만드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변혁은 언제나 문화적 혁신의 형태를 취한다.


 조심스럽게 새 미사의 성 변화를 살펴보면 종도시대(사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식 전문(Roman Canon)중 본래부터 있었던, 대부분의 옛것에 대하여 첨가하거나 도는 금지함으로써 루터 양식에 가깝도록 재구성했다. 프랑스어 번역본에서는 경문의 의미를 다중적(pro multis)으로 바꿔서 한발 앞서갔다. “..........피니, 너희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바니라” 대신에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바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으로, 신학적인 측면에서 크나큰 차이, 의미가 있다.


 요즈음 대부분 사제들을 보면 로마식 미사경본에서 “면병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양손으로 잡은 채, 면병에 대고 낮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주의(注意)를 다해서 변화지례(變化之禮)의 경문을 발음할지니라.”고 한 예식법규에서 하라는 대로 잠간 숨을 돌리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저 수난 전날에 거룩하시고 존경하올 손에 면병을 가지시고”로 시작하는 전문의 첫 번째 부분을 그냥 지나치듯이 암송해 버린다는 것이다.


 어조를 근엄하게 바꾸어서 “대저 이는 곧 내 몸이니라(Hoc est enim Corpus Meum)”라고 발음하는 다섯 마디가 성 변화의 기적을 일으키며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주의 성 변화에 대해서도 경문을 같은 방식으로 발음해야 한다. 새 미사경에서는 기념식을 진지하게 진행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이야기체의 어조(語調)로 유지할 것을 거행자에게 요구한다.


 이제 독창성이 규범이 되어 버려서, 어떤 거행자는 성체를 두루 보여 준다든지 심지어는 과장된 태도로 부서뜨리기까지 하면서 본문을 암송하기도 하고 경문에 몸짓을 섞어 가며 본문을 더 잘 설명하려 들기도 한다. 네 번의 장궤(무릎꿇기 예절)가 두 번의 장궤가 되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며 때로는 아직 남아있는 두 번의 장괘 조차 생략되는 것을 보면, 과연 성 변화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 또 그럴 의향이 있는지 사제 스스로 의심을 갖을 정도까지 되었다.


 가톨릭인이 어리둥절하게 되고 나면 몹시 근심스러워지는 법이니.... 여러분이 참례하는 미사는 과연 유효한가? 그대가 받는 성체는 진짜 그리스도의 몸인가?


 이는 중대한 문제다. 평범한 신자로서 도대체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미사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 재료, 형식, 의향 그리고 유효하게 신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그것이다. 제헌경, 전문 그리고 사제의 영성체는 완전한 제사와 성사를 이루는 데 필수적이기는 해도, 유효성에 대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은 않다. 민첸티 추기경(Cardinal Mindzenty). 자기 나름대로의 지표(指標)가 아닌 우리 주님의 몸과 피로써 자신을 보양(補養)시키고자 하여, 감옥에서도 작은 빵과 포도주를 향해 변화지례의 경문을 몰래 몰래 발음한 그 추기경은 제사와 성사(聖事)를 온전히 성사시켰음에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미국 주교가 단맛 나는 케이크를 가지고 집전(執典)한 미사는 축성경(祝聖經0이 심각하게 변형되거나 생략된 미사와 마찬가지이니, 틀림없이 이 미사는 무효다. 나는, 거행자가  간단하게 성변화를 잃어버린, 창의성이라고 할 정도까지 이를 만하게 조금도 문젯거리를 만들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사제의 의향을 판가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확실히 단언하건대 사제의 신덕이 붕괴되어 (그 의향을 전혀 바꿀 수 없는)교회가 항상 전통적으로 행해 온 것을 그대로 행할 의향이 없는 정도에 따라 미사가 무효해진다. 지금 이 시대에 신학생이라는 이들은 유효한 미사를 이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 신학생들은 미사성제가 자신의 사제 생활에서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절대 과장하지 않고 말하지만 제대석(祭臺石 - 聖石)도 없이 평범한 그릇과 발효된 빵을 가지고서 전문, 기타 등등의 본문 중에 불경스런 경문을 도입한 상태로 거행하는 미사는 그 대부분이 신성 모독인 것이어서 신앙을 감소시키고 이에 따라 신앙을 방해한다. 신성 격하는 미사의 ‘신덕의 오묘함’이라는 초자연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그냥 자연스런 종교행위로만 등급을 약화시킨다.


 아마도 여러분들의 혼란은 다음과 같은 유형일 것이다. 내가 주일의 의무를 채우기 위해서 (다른 것이 없으니)유효하지만.... 이러한 신성 모독적인 미사에 참례해도 되는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미사는 의무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미사참여 문제는 윤리 신학 규범을 생각해야 되니, 신앙을 위태롭게 하거나,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법을 적용해야 한다.


 아무리 전례 규범에 맞추어서 경건하고, 존경심을 다해 새 미사를 드린다 해도 개신교의 정신에 침범되어 있으므로 똑같은 제한을 받는다. 그 안에는 신앙에 해로운 독이 들어 있다. 새 미사는 문젯거리가 된 상태임으로 해서 오늘날의 프랑스 가톨릭은 전교(傳敎) 대상국가에서나 통용될 법한 수계범절의 조건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곳 중 어떤 지역에 있는 이들은 1년에 겨우 서너 번 정도만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신자라면, 적어도 1개월에 한 번은 미사를 계속 드리고 있는 장소 중 한 군데에서 성총과 성화의 참된 근원인 모든 시대의 미사(영원한 미사)에 참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할 의무가 있으니, 혹시 내 말이 오류는 아닐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도 갖지 말고, 성 비오 5세에 의해 성문화된 (누구나 빈번이 말하듯이 그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닌)미사에는 세 가지 속성, 즉 희생제사, 실제적인 현존 그리고 성직자의 사제직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뜨리덴틴 공의회가 지적했듯이 그것(성 비오 5세에 의해 성문화(成文化)된 미사)은 천주성을 향하여 묵상(默想)하도록 고양(高揚)되려면, 인간의 특성상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고려(考慮)하고 있다. 기존의 관습은 아무렇게나 된 것이 아니니, 무조건 폐지한다거나 갑자기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 얼마나 많은 젊은 사제, 얼마나 많은 주교들이 그러한 미사의 변혁을 도입시키는 바람에 신앙을 잃어버렸는가! 본질과 신앙을 방해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것이니!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인간은 이제 1세기 전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한다. 인간이 기계 문명 때문에 그 본질까지도 변해 버렸다는 것인가? 이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혁신자들은 개신교를 따르는 노선에 떨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극히 조심을 다하고 있다. 저들은 또 다른 논의에도 호소하는데,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저들이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야간 신학교에서 설명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늘날 진정한 문화의 변화에 직면하고 있음을 직시(直視)해야 한다. 이제는 주님을 기념하는 특별한 태도는 우리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 단숨에 말해 버려 금방 모든 것이 허공 속으로 전부 사라지게 한다. 그 문제를 논하려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니 이는 기운 빠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을 바꾸기 위해 저들이 사용하는 궤변은 늘 그런 식이다. ‘종교 영역’이라니(?)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솔직히 말하는 게  더 좋겠다.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닌 다른 종교’를 다루고자“ 한다고 말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