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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04. 영원한 미사와 현대의 새미사(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6-26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4. 영원한 미사와 현대의 새미사(1) 

4. The Mass of All Times versus the Mass of Our Time.

 


 어느 것을 고를 1981년 성체 대회(Eucharistic Congress)를 준비하면서 한 설문지가 배부되었는데,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다음 두 가지 정의(定義), 즉 ‘미사성제’와 ‘성찬식’ 중에서 마음대로 선택하라면 것인가?” 이런 문제는 임의적인 것이 조금도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에 대해서 선택권을 조금 주는 동시에, 개별적인 판단에 호소하면서 (논란이 되는)질문하는 방식에 할 말이 많다. 미사를 정의(定義)하는 것이란 국민이 어느 당(黨)을 택하는 것처럼 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 이럴수가! 설문지를 만든 사람이 중대한 실책을 범한 것을 계기로 인하여 오류가 서서히 스며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전례상의 변혁(變革)으로 인해서 제사라는 관념과 본질이 점점 식사의 성격으로 변하게 된 점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이는 성찬식 거행 혹은 ‘만찬’을 일컬어 무엇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제 ‘제사’라는 표현은 훨씬 덜 사용되고 있다. 교리문답에서도 거의 다 사라지고 또한 강론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성 히뽈리투스(St. Hippolytus)에 의한 교회법 Ⅱ에서도 빠져 있다.


 이런 경향은 실제현존에 관하여 인식에 하고 딸린 문제로, 희생이 없다면 제물도 역시 있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희생이 있으니 제물이 있는 것이다. 미사를 기념이나 형제애를 나누는 식사로 여기는 것은 개신교의 오류다. 16세기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당시 일어났던 일이 지금 새미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대를 탁자로 바꿨고, 제대에서 십자고상을 치웠으며, ‘집회의 장(長)’이 회중을 마주 보게끔 하였다. 개신교 양식의 “주님의 만찬”이라는 설정(設定)은 프랑스 주교들이 어린이 출석 교리문답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마련한 기도서, 피에르 비반드(Pierres Vivantes)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를 기념하려고 모이는데, 그것이 미사다 .....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선포하며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다. 집회를 주관(主管)하는 사제는 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지금 가톨릭교에서는 미사를 거행하는 사람은 사제로, 그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다. 회중의 장(長)이라는 개념은 개신교에서 직접 들여온 것이다. 어휘는 생각의 변화를 쫓아간다. 예전에는 “몬시뇰 류스티제(Mgr. Lustiger)가 주교 미사를 거행할 것이다”라고 했었다. 현재 노틀담 라디오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절은 “장마리(Jean-Marie) 류스티제가 공동거행을 주관할 것이다”이다.


 저들이 미사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스위스 주교단회의(Conference of Swiss Bishops)에서 발행한 소개서를 보면, “먼저 주의 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이룬다. 그것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동안 죄인들과 같은 식탁에 둘러 앉으셨을 때의 것과 똑같은 친교로서, 부활하신 날 이후로 성찬식으로써 계속되어 왔다. 주님이 당신 친구를 초대하시어 한 곳에 모으시고 또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톨릭인이라면 모두가 같은 태도로 “아니다! 미사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미사는 우리 주께서 부활하신 후 어느 날 아침 호숫가에서 성 베드로 및 몇 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을 때와 같은 종류의 식사를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땅에 내려 보니 숯불판 위에 생선을 얹어 놓고 또 면투가 있더라. 예수 저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와서 먹으라’ 하시니 앉아서 먹는 자 중에 감히 ‘뉘시니까’ 하는 이 없으니 저들이 다 주신 줄을 앎이러라. 예수 가까이 오사 면투를 가져 저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또한 그와 같이 하시니”(요왕 21: 9-13).


 사제와 신자들의 친교라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제대 위에서 주님 자신을 직접 바치는 제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를 말한다. 제대는 단단한 돌로 되어 있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그 안에 희생의 돌인 성석(聖石)(제대석이라고도 함-성인의 유골을 넣은 돌판)이 들어 있어야 한다. 순교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렸기에 그 제대석 안에 그 분들의 유해를 안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님의 성혈(聖血)이 순교자들의 피와 친교를 이루게 되어 우리는 각자의 삶을 봉헌하도록 고취된다.


 미사가 식사라고 한다면 사제가 회중을 향해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그 누구도 식사 때에는 손님에게 등을 돌리고서 주인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사는 천주께 드리는 것이기에 회중을 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제가 신자들의 우두머리로서 천주 및 제대 위의 십자고상을 향하는 이유다.


 기회 있을 때마다 저들은 새 주일미사경본에서 ‘성체성사 제정 설화’를 이야기 하며 이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파리 대교구 담당공관인 장 바르(Jean-Bart) 센터에서는 “미사의 중심에는 설화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다! 미사는 결코 설화가 아니고 행위인 것이다.


 미사가 십자가 제사(祭祀)의 계속성을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 세 가지가 있다. 제물봉헌, 제물을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유효한 것이 되게 하는 성 변화(聖變化) 그리고 우리 주님이신 대사제(大司祭)를 대신하여 당신의 사제직으로서 축성된 사제에 의한 거행이 그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미사로써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 식사를 동반한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이야기, 다시 말하자면 단순한 기념은 위에서 언급한 것을 결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미사의 초자연적인 덕은 십자가 제사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믿지 않고는 성 교회에 관하여 아무 것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 교회가 존재할 이유를 상실하게 되며, 가톨릭인이라는 주장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마르틴 루터는 미사가 교회의 중심인 동시에 영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사를 무너뜨리자, 그러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새 미사, 말하자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채택된 새 양식의 미사(Novus Ordo Missae)가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노선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거나 적어도 은밀히 밀착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루터에게 있어서 미사는 찬양의 제사, 말하자면 찬양의 기도, 감사의 기도였지 십자가 제사를 재현하고 그 공덕을 얻어 입는 속죄제(贖罪祭)는 결코 아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 제사란 (예수 생애의)특정한 역사 가운데 어느 시점(갈보리)에만 일어난 것으로, 그 역사의 순간에만 제한된 것이었다.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힘을 빌려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자신을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와는 반대로 성 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미사 때마다 제대 위 면주(떡과 술)의 형상 안에서 몸과 성혈이 피 흘림 없이 분리되는 방식으로, 그 같은 희생제사가 신비롭게 실현된다는 점을 지지한다. 이러한 재현이야말로 성총의 원천을 시간과 공간 안에 영구 보존시키는 십자가의 공로가 흘러내리게 하여서 그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그 공덕을 얻어 입을 수 있게 한다. 성 마두의 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나 문득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한가지로 있노라.”


 이 개념의 차이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가톨릭 교리의 변혁을 이용하여 본래의 개념을 축소시키려고 하는데, 특히 전례(典禮)에서 그 징후를 많이 볼 수 있다. 루터는 “경배는 주종 관계에서 천주님을 주인으로 보고 드렸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위로하고 비출 것이다. 예전에는 희생제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설교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인본주의 문화를 교회 안에 도입시킴에 따라 이제는 교회의 중심이 ‘말씀의 전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주: 개신교를 보라) 새 미사경본에도 그런 변혁이 이루어져 있다. 정치나 사회적 관심을 전파하는 데 자주 이용되는 ‘신자들의 공동 기도’가 있는 독서가 기존의 두 가지에 첨가되었고, 이야기 전개하는 가운데 교훈을 취하면서 대체적으로 결국에는 그 우위(優位)가 ‘말씀(설교)’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설교가 끝나면 미사는 마무리 부분에 매우 근접한 상태가 된다. (일러두기: 진정한 제사의 핵심부분은 제헌경부터 미사 끝까지로서 이를 신자들의 미사라 한다. 그런데 현대의 새 교회에서는 말씀의 전례가 마치 미사의 중심인 듯 보이게 되니, 이 부분도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제는 교회 안에서 지울 수 없는(사라지지 않는)인호(印號)로 각인되어 있으니 그 인호야말로 사제 자신인 동시에 제대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게 하는 것으로서, 사제만이 홀로 거룩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구분을 ‘로마주의자들이 구축한 제1의 벽’이라 칭하면서, 그리스도인이면 우리 모두가 다 사제이며(만인 사제설) 목자란 다만 복음적인 미사를 주관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고 했다.


 새 미사(Novus Ordo)에서는 거행자인 ‘나’를 ‘우리’로 바꿔 놓았다. 신자들이 직접 ‘거행’한다는 말이 모든 곳에 쓰여 있으며, 그들이 직접 경배 행위에 참여하고 서간경과 때로는 복음까지도 낭송하며 성체를 분배하고 때때로 교훈까지도 설교하는데, 사전에 모여서 주일 예식을 ‘꾸미는’ ‘소그룹에 의한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대화’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첫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교구 조직의 중책을 맡으면서 이 같은 성격의 계획을 성사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거행자는 성직자가 아니고 회중(會衆)이다”(전국사목전례센터-National Center for Pastoral Liturgy의 유인물)내지는 “회중이야말로 전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주체로”, 문제는 “예식의 기능이 아니고 회중이 자체에 부여하는 모습과 공동 거행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관계”이다(전례변혁의 설계자로서 파리 가톨릭 대학교-Paris Catholic Institute의 교수 즐리노- P. Gelineau).


 문제가 되는 것이 회중이라면 개인적으로 드리는 미사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먼저, 평일에는 회중(신자)을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어짐으로 사제들이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는 변할 수 없는 교리인 십자가 희생의 공덕을 얻어 입는 것, 그리고 이에 딸린 모든 목적, 즉 흠숭, 감사, 속죄와 구은(求恩)을 위해서는 교회가 반드시 복합적인 속성을 지닌 미사성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위배된다.


 마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듯이, 어떤 사람의 목표는 (미사에서)사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인데 이는 저 악명 높은 ADAP(사제가 없는 주일 집회-Sunday Assemblies in the Absence of the Priest)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주님의 날을 기념한다면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신자들을 상상해 보자. 그러나 이 ADAP는 실제로는 유독 성 변화(聖 變化)만을 빼먹는 일종의 ‘황폐(荒廢)한 미사’로서, 릴(Lille)의 사회와 종교 연구를 위한 지역 센터(Regional Center for Social and Religious Studies)의 문서를 읽어보자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 변화를 없애는 것은 오직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평신도에게 그런 행위를 실행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단다. 사제의 부재(不在)란 그저 ‘신자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한’ 계획에 불과한 것이다. 즐리노 신부는 디망 라 리뚜르(Demain la Liturgie)에서 ADAP는 ‘정신 구조가 바뀔 때까지만 교육시키는 과정’일 뿐이라고 쓰고 있으며, 교회에는 아직도 사제들이 너무 많다는 어리둥절한 논리로 결론을 맺는데, “조속한 시일 내에 변혁을 실현시키기에는 사제가 너무 많다”는 뜻이 아닌가?

                                        ( 영원한 미사와 현대의 새미사(2) 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