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성비오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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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교회의 거룩한 전례의 보화를 증언해야만 합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11-19

도미니크회 신학자 보이치에흐 고와스키 신부님의 공개서한 


 “나는 교회의 거룩한 전례의 보화를 증언해야만 합니다.”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입니다. 보이치에흐 고와스키(Wojciech Gołaski) 신부님의 공개서한은 이미 폴란드어로 출판되었습니다. 다음은 저자가 Rorate Caeli씨에게 준 영어 번역본입니다. 성비오10세회(SSPX)의 문제에 대해 어느 입장에 서든, ‘전통주의를 지키는 이들(Traditionis Custodes)’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 대해 주의 깊게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Jamna, August 17, 2021

His Holiness Pope Francis
Domus Sanctae Marthae
The Holy See   Vatican City


참조:
Rev. General Master of the Order, Gerard Francisco Timoner III OP
Rev. Provincial of the Polish Province, Paweł Kozacki OP
H.E. Bishop of the Tarnów Diocese, Andrzej Jeż
Rev. Superior of the House in Jamna, Andrzej Chlewicki OP
Brothers and Sisters in the Order
Rev. Superior of the Polish District of the Fraternity of St Pius X, Karl Stehlin FSSPX
Omnes quos res tangit


교황 성하

 저는 57년 전에 태어나 35년 전에 도미니크회에 입회했습니다. 저는 29년 전에 종신 서원을 했고 지금은 28년 동안 사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1970년의 개혁(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거룩한 미사를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서품받은 지 16년 후, 두 명의 평신도 친구(둘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입니다)가 나에게 전통적인 미사에서 미사를 거행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촉구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고전적 형태의 미사를 발견했습니다.


-
사제와 신자 모두의 모든 관심을 신비로 향하게 하고,
- 지금 여기 제대(祭臺)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말과 몸짓으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며,
- 정확성과 동등한 능력으로 집전자와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며,
- 전례(奠禮) 중에 사제나 신자를 자신들의 (새로운) 발명이나 창조로 이끌지 않으며,
-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을 침묵과 명상의 길로 인도하고,
- 전례 몸짓의 수와 성격에 따라 천주님에 대한 끊임없는 경건과 사랑의 행위 가능성을 제시하며,
- 사제와 신자들을 결합하여 제대의 같은 쪽에 놓고 같은 방향으로 (십자가와 주님으로) 돌립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거룩한 미사이구나! 그리고 16년 차 사제인 저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유레카(발견)이었습니다. 그 후에 미사에 대한 제 생각은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전통 전례는 고정관념과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식주의라는 대신에, 천주님 앞에서 영혼의 자유로운 표현, 냉담 대신에 신성한 숭배의 열정, 거리감 대신에 친밀감. 낯설음이라는 대신에 친근감, 엄격함이기보다는 안전감, 신자들의 수동성이라기보다는 신비에 대한 그들의 깊고 생생한 연결입니다(결국 제가 전통적인 미사에 인도된 것은 평신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사제와 신자들 사이의 간극(chasm) 대신에 교회 경전(經典)의 침묵으로 보호되고 표현되는 참석한 모든 이들 사이의 긴밀한 영적 일치. 이 발견을 하면서 나에게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이 형태가 우리 이전에 살았고 신앙을 물려준 세대에 대한 우리의 다리(bridge)입니다.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이 교회 일치에 대한 나의 기쁨은 엄청났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전통적인 형태 속에서 미사에서 오는 영적 매력의 강력한 힘을 경험했습니다. 저를 매료시킨 것은 기호 자체가 아니라, 영혼이 읽을 줄 아는 기호의 의미였습니다. 다음 봉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열망과 갈망으로 봉헌할 모든 기회를 찾았습니다. 곧 내 안에 완전한 확신이 충만해졌습니다. 제가 (그리고 모든 성사(聖事)와 전례뿐만 아니라) 미사를 내 생애가 끝날 때까지 전통적인 형식으로만 거행한다면, 공의회 이후의 형식을 조금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개혁된 전례의 맥락에서 전통적인 미사 봉헌에 대한 나의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면, 저는 "안도감(relief)"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의 안도감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발을 문지르고 자극하는 조약돌이 있는 신발을 신고 걸었지만, 다른 걸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16년 후 조약돌이 없는 신발 한 켤레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신어봐", "시도해!" 저는 거룩한 미사를 재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 형태, 즉 수 세기 동안 사용되어 온 미사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공의회 이후의 미사의 놀라운 차이점을 재발견했습니다. 이전 형식을 몰랐기 때문에 이 차이를 몰랐습니다. 전통적인 전례와의 만남을 나를 입양하여 나의 양부모가 된 사람과의 만남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전통 미사와의 만남은) 늘 나의 어머니이시면서도, 저는 어머니를 알지 못했던 그 어머니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일에 교황님들의 은총을 동반했습니다. 그들은 1962년 미사 전례서가 “법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으며, 원칙적으로 (전통 미사는) 항상 허용된다.”라고 가르쳤으며, “이전 세대에게 신성한 것이 우리에게도 신성하며 위대한 것으로 남아 있고,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완전히 금지될 수는 없었습니다. 유해(有害)한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신앙과 기도를 통해 발전된 부요(富饒)를 보존하고 적절한 위치를 제공해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2007)


 신자들 또한 이렇게 배웠습니다 "공경과 옛적에 사용한 것이기에, 특별양식(forma extraordinaria)이라는 그것 때문에 명예와 함께 유지되어야 한다."; 이 전통 미사는 “보존해야 할 귀중한 보물”(지침, Universae Ecclesiae, 2011)로서 묘사됩니다. 이 말씀들은 1970년 개혁 이후 신자들이 전통 전례를 사용할 수 있게 한 이전 문서를 따랐으며, 첫 번째 문서는 1984년 Quattuor abhinc annos 입니다. 이 모든 문서의 기초와 출처는 성비오10세 칙서(Bull of Saint Pius V)인, Quo primum tempore(1570년)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하, 교황 비오 5세의 엄숙한 문서를 잊지 않고, 성하의 직계 전임자들의 선언을 포함하는 시간 경과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1984년부터 2021년까지 37년 동안 지속됩니다. 그 기간에 성 교회는 전통적인 전례에 관하여, 그리고 더욱 강력하게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제시한 길을 택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는 사람, 즉 천주 현존과 천주 성체 봉헌의 그릇인 이 전통 의식(儀式)이 자기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천주님께 맡기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온전히 열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전례 의식의 그릇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주시(注視)하고 이행해야 합니다. 저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7월 16일이 왔습니다.

성하, 제가 12년 동안 걸어온 길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하의 문서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두 교황의 확언을 받았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성 비오 5세께서 공포하신 로마 미사 전례서가 “가톨릭 로마 예식 교회의 특별 표현으로 간주(看做)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 성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발표된 전례서가 로마 예식의 유일한 표현이다.“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후계자(프란치스코)의 확인은 아직도 살아 있는 전임자(베네딕토 16세)의 확언을 부정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한 모든 교황에 의해 인정된, 2021년 7월 16일까지도 인정되고 또한 수 세기에 걸쳐서 그 관행으로 거룩하게 된 미사, 수백 년 된 태고의 전통에 의해 확인된 미사 거행 방식이 갑자기 중단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특성은 전례에 내재된 본질이 아니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는 외적인 속성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전통적인 전례는 로마 예식 법규를 모든 행위와 문장, 그리고 그들이 구성하는 전체로 표현됩니다. 태고(太古) 때부터 방해받은 바가 없기에, 교회가 항상 거행해 온 것처럼 이 또한 (전통) 교회법규를 표현하는 것은 보증됩니다. 우리는 [베네딕토의] 교황의 첫 번째 확언은 견고한 기초를 가지며, 진실이고, [프란치스코의] 두 번째 확언은 근거가 없고, 거짓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그것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법의 힘을 부여받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래에 쓸 결과를 가져옵니다.


 1962년 미사 전례서의 사용에 관한 허용은 이제 이전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전통적인 형식을 고수하는 사랑에 더 이상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개혁된 전례로 “돌아가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들은 바 없군요- 자의 교서의 말과 주교들에게 보낸 당신의 편지는 그 결정이 이미 취해졌으며, 교회의 생활에서 전통적인 전례를 제거하기로 이미 도구화되었으며, 망각의 심연으로 던져졌음이 완전히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전통 미사 전례는 교구 교회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성비오10세회와 같은) 새로운 그룹을 형성해서는 안 되며, 새로운 사제가 말하려면 로마와 상의해야 합니다. 주교들은 이제 실제로 전통을 수호하는 이(Traditionis Custodes)가 되어야 하니, "전통의 수호자"이지만 그것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감옥의 수호자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는 나의 확신을 표현하겠습니다. 이러한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7월 16일에 나온 두 서한을 주의 깊게 분석하면 헤겔주의, 명목론, 교황의 전능에 대한 믿음, 집단적 책임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드러납니다. 이들 각각은 당신의 메시지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며, 그 중 어느 것도 가톨릭 신앙의 유산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앙과 화해할 수 없기에, 이론이나 실천으로도 신앙에 통합되지 않을 것입니다. 차례대로 각각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헤겔주의(Hegelianism). 이 용어는 전통적인 용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독일 철학자 헤겔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체계에서 파생된 것, 즉 역사를 지속적 변화의 선하고, 합리적이며, 불가피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플로티누스(Plotinus)로부터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 헤겔(Hegel), 마르크스(Marx), 그리고 그들의 현대 후계자들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접근 방식의 특징은 역사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각각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 이전 단계의 끝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헤겔주의를 “성세화(聖洗化)”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가정된 역사적 단계에 성신의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성신은 이전 세대에게 말씀하지 않은 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거나, 심지어 이전에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을 나누어 주신다고 가정합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세 가지 중 하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단계에서 성신께 순종하지 않거나, 성신이 변화될 수 있거나, 성신이 그 안에 모순을 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또 다른 결과는 우리가 교회와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합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 신앙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신자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러 국면에 속한 집단의 집합체로 여겨집니다. 이 그룹들은 더 이상 공통 언어(라틴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오늘날 성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전통 자체는 더 이상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하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신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거듭거듭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황께서 주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처럼 종종 특정 사건에 적용되는 “전통의 역동성(the dynamic of Tradition)”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것의 한 예는 이 역동성의 “마지막 단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며, 그 기간 가톨릭 주교들은 성신이 교회에 보여주신 길을 듣고 분별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새로운 단계가 새로운 전례 형식[역자 주: 새로운 미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 단계는 이미 끝난 이전 단계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단계는 공의회를 통해 성신의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접근하면서도 옛 모습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성신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신앙에 어긋납니다. 가톨릭 신앙의 규범인 성경은 그러한 역사 이해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르쳐줍니다. 율법(계명)에 관한 책(구약)의 발견을 알게 된 요시야 왕(King Josiah)은 반세기 동안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월절(Passover)을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왕하 22-23장). 이처럼 에스라(Ezra) 와 느헤미야(Nehemiah)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서 전 백성과 함께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을 지켰습니다(느 8장). 각각의 경우에 율법의 오래된 문서는 혼란의 기간 후에 천주 흠숭을 새롭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도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유로 의식(儀式)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2) 명목론(Nominalism). 헤겔주의가 역사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지만, 명목론은 통일성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칩니다. 명목론은 (하향식 행정 결정을 통해) 외부 통합을 도입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을 달성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뜻합니다. 명목론은 영적인 실재를 물질적으로 파악하고 규정함으로써 영적인 실재를 폐지하기 때문입니다. 성하, 성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내가 나의 전임자들이 부여한 권한을 철회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수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목표, 진정한 통일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의 전임자들은 (그대와) 반대 결정을 내렸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참된 일치에는 영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단순한 외적인 일치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외적 기호의 일치로 그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방식으로 참된 일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빈곤함과 일치와 반대되는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단결은 능력의 철회, 동의의 철회, 제한의 부과로 인해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르호보암 왕(King Rehoboam)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그들의 부담을 개선하기 위해 두 그룹의 조언자들과 상의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관용과 백성의 짐을 줄이는 것을 권고했습니다. 성경에서 나이는 종종 성숙을 상징합니다. 왕과 동시대인 젊은이들은 짐을 늘리고 거친 말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성경에서 젊은이는 종종 미성숙을 상징합니다. 왕은 젊은이들의 조언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일치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라를 두 왕국으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왕상 12장). 우리 주님은 이 미덕의 부족이 분열의 원인이 되었음을 아시고, 온화함으로 이 분열을 치유하셨습니다.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외적인 기준으로 일치를 평가했습니다. 이 접근 방식은 구세주께서 친히 고치셨습니다. 구주께서는 성 요한의 말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스승이여, 우리 등이 보오매, 어떤 사람이 스승의 이름을 의지하여 마귀를 쫓아내되,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는고로 저들을 금하나이다.” ‘금하지 말라. 대저 너희를 거스르지 않는 자는 곧 너희를 위하는 자이니라.“(루카 9,49-50, cf. 마 9,38-41). 성하, 당신께는 “반대하지 않는” 수십만 명의 신자들(역자 주: 성비오10세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하께서는 그들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일치의 더 깊고 영적인 기초를 알려주는 구세주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헤겔주의와 명목론은 종종 동맹이 됩니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는 각 단계가 돌이킬 수 없이 끝나야 한다는 확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3) 교황의 전능에 대한 믿음.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고전적인 형태의 전례 사용에 더 큰 자유를 부여했을 때 그는 수백 년 된 실행되어진 관습을 언급하셨습니다. 이것들은 그분의 결의에 견고한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성하의 결정은 그러한 기초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고 견디어왔던 어떠한 것을 폐지합니다. 성하, 성하께서는 성 비오 5세의 결정안에서 지지를 받는다고 글을 쓰시지만, 그러나 그분은 당신과는 정반대의 기준을 적용하셨습니다. 그분 성 비오 5세에 따르면, 수 세기 동안 존재하고, 지속되었던 것은 방해받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로지 더 새로운 것만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결정을 위한 유일한 근거는 교황의 권위를 부여받은 한 사람(프란치스코 개인)의 의지입니다. 교황의 이 권위가 아무리 크더라도 고대 전례 관습이 로마 교회의 법규 표현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때 존재했으나,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천주께서 일으킬 수 있는지 자문합니다.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모순은 천주님의 전능 일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Summa Theologiae , p. I, qu. 25, art. 4). 이와 유사하게, 교황의 권위는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신앙(lex credendi)을 표현해 온 전통 의식(儀式)이 갑자기 어느 날 더 이상 같은 교회의 기도법(lex orandi)을 표현하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황은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을 훨씬 넘어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는 일치를 위반하는 결정은 내릴 수 없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권위보다 더 큰 일치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주님이 주신 일치이며 인간의 기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보다 우선하는 것은 일치이지, 권위가 일치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4) 공동 책임. 성하, 결정의 동기를 밝히시며, 성하께서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인정하신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다양하고도 중대한 주장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학대를 자행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서, 몇 명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자주'와 '많이'라는 단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다수(多數)인지 그조차도 모릅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한 능력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은 가혹한 형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또는 불특정 미래 시간에 그들의 영적 길을 박탈당했습니다. 칼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의 생산과 유통을 금지해야 합니까? 성하, 그대의 결정은 칼을 만드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금지라는 가상의 불합리함보다 훨씬 더 비참합니다.


성하: 왜 그러세요? 왜 성하께서는 우리 주님의 가장 거룩한 희생을 봉헌하는 고대 형태의 거룩한 관습을 공격했습니까? 널리 퍼졌거나 보편적인 다른 형태로 행해진 학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되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한 문화의 소멸이 한 종의 식물이나 동물의 소멸만큼 심각할 수 있으며,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Laudato si 145), 그리고 그러면 몇 년 후,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교회 자체의 영적, 문화적 유산의 상당 부분이 소멸될 운명입니까? 왜 당신께서 만든 '심층 생태학'의 법칙이 이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당신께서는 그 대신에 전통적인 미사 전례를 돕는 신자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는 것이 성신의 징조가 될 수 있는지 왜 묻지 않았습니까? 성하께서는 가말리엘의 조언(행전 5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휴직법에도 없는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세속 통치자들의 본이 되시며, 무엇보다도 교회 권위의 으뜸이신 주 천주님은 그분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권능은 정의의 시작이라. 이는 그대 모든 이의 주님이시오, 대저 너 자신을 모든 이에게 자애롭게 만드시기 때문이로다. 그러나 당신은 권능의 주인이요, 최고 높으신 판관이요, 우리를 가장 좋으신 호의로 베푸시나니, 왜냐하면 그대의 권능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지혜 12, 16-18). 진정한 힘은 가혹함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혹함은 천주의 모델을 따르는 권위의 속성이 아닙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친히 이것에 대해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마태 20,24-28). 말하자면, 천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아래에서 양탄자가 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천주님을 향해 그들이 걷는 바로 그 땅을 박탈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가톨릭과 상충(相衝)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천주님의 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하, 12년 동안 발아래 땅을 경험하고, 갑자기 그것이 더 이상 거기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낸 내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황의 권위는 엄청납니다. 그러나 이 권세도 내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만들 ​​수 없게끔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의 생명은 두 번의 상호 배타적인 파열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중 하나는 보물을 여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이 보물의 가치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이 보물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제가 이러한 모순을 받아들인다면 저는 더 이상 어떤 지적 삶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영적 삶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두 개의 상반되는 진술에서, 참이든 거짓이든 어떤 확증도 뒤따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성적 사고의 종말, 현실에 대한 모든 개념의 종말,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 특히 도미니코회의 생활의 기본 구성 요소입니다.


 저는 내 성소(聖召)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성 도미니코 수도회 내에서 내 삶과 봉사를 계속할 것을 굳게 결심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그 생활을 하려면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21년 7월 16일 이후에는 기존 구조 내에서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저는 성 교회의 거룩한 예식(禮式)의 보화,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발아래 땅, 그리고 그들의 경건의 어머니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이제 근본적인 변화(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지를 훨씬 능가하는 변화)의 시작부터 함께 교회의 전통을 옹호해 온 사람들, 이성의 요구 사항에 대한 교회의 존중과 가톨릭 신앙의 변하지 않는 유산을 신자들에게 계속 전달하는 성비오10세회(SSPX)에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비오10세회는 전적으로 나의 도미니코회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천주님과 성 교회에 대한 봉사의 삶, 모순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봉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적이며 교회를 그토록 격렬하게 공격해 온 그러한 모순에 반대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성비오10세회(SSPX)와 교회의 공식구조 사이에 논쟁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교회 내부의 분쟁이며, 매우 중요한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7월 16일의 문서와 결정으로 인해 이 주제에 대한 제 입장은 성비오10세회(SSPX)의 입장과 수렴(收斂)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저는 이 편지가 이러한 노력 일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용되는 수단은 초자연적인 근원에서 나오는 진리와 부드러움에 대한 겸손한 존경심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논쟁의 해결과 현재를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통일의 재건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성하, 제 말에 주의를 기울이신 것에 감사드리며, 사도적 축복을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심으로

Fr. Wojciech Gołaski, 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