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성비오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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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비오10세회 설립 50주년, 총장 서한(2020.1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2-18





금경축은 인간의 생명에서 항상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기관의 생명에서
그것에 도달하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성비오10세사제회는
이 50년의 존재에 대해 천주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든 전투의 궁극적 존재 이유와 목적은 우리의 왕이시며, 복되신 주님과 친밀하게 결합된 생명이다.”



성비오10세회의 모든 구성원 및  신자들께,


우리 회의 금경축을 기념하며 역사속의 이 특별한 순간에 이 글을 드림은 저에게 크나큰 기쁨입니다. 성 비오 10세회 50주년 기념일은 우선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근원적인 감사를 드릴 기회입니다.


첫째로, 모든 시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원하시고 힘주시는 분, 여러 어려움들을 뚫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천주께 감사드립니다. 만일 반세기 우리 역사에서 십자가들이 끊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신적 섭리, 즉 오직 그분의 다스리심과 충실한 종들의 성화를 위하여 악을 허용하신 섭리의 매우 특별한 은혜의 증거입니다. 우리 설립자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분은 깊은 신덕의 빛을 받아 천주의 사랑안에서 꺼지지 않는 망덕으로 지지되어 두려움 없는 애덕의 불꽃을 지니고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50주년은 또한 오늘날의 상황을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의 창립자로부터 받은 불꽃이 아직 크게 살아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그리고 비오 10세회 안에서 불분명하게 지속된 전체적인 모든 위기의 바람가운데 퇴보와 약화의 위험에 흔들리지 않는 소중한 횃불이 나타났습니까?
 

한편으로 그 끝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지속되는 모든 전투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는 듯 합니다. 싸움을 지속하는 일이 진정 필요한가요? 또 한편으로는 50년에 걸친 투쟁 뒤에 성 비오 10세회는 꽤 편안하게 자리잡았고 상대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상황들이 우리에게 위협은 아닐까요? 뒤를 이을 이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전해주어야 할 이 불꽃이 되살아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는 데 언제나 우리의 존재 이유를 검증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이 첫 50주년의 전환기에서 지속해 나가고자 한다면 위 사항은 필수적입니다.


1. 성비오10세회는 전투적이어야 하는가?


가톨릭 교회가 처한 60년의 끔찍한 위기에서 천주께서 성 비오 10세회를 세우신 섭리적인 환경들은 진짜 전투가 될 한가운데에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위치를 감당하도록 다그칩니다. 전투적이어야 함은 성 비오 10세회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부터, 우리 회는 믿음과 용기와 항구함으로 교회의 적들을 거슬러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하여 이 투쟁의 깊은 본질이 우리에게만 예외적이라거나 근원적인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전투적이어야 함은 지상 교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성 비오 10세회는 가톨릭 교회의 부분이므로 필연적으로 전투적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또 분명히 오늘날까지도 그것은 사제직의 보존을 위한 투쟁, 그리고 미사와 전례의 보존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의문의 여지없이 신앙을 지키고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투는 심지어 로마에서조차 이 세대에 급증하는 배교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위협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간략하게 이는 그리스도 왕과 영혼들과 국가들에 대한 그분 다스리심을 위한 투쟁입니다.


“우리는 투쟁의 본질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짧게 끝내지 말아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전투에 대한 참된 관점은 무엇일까요? 미사와 사제직을 위한 싸움의 중심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왕이신 우리 주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삶, 영적 생명입니다. 왜 우리는 신앙과 그리스도 왕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까? 이 실상은 온 교회의 목적이며 역사상 전투들의 궁극적 존재 이유입니다.
 

본 회는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 안의 영적 생명의 발전은 섭리적 존재의 실제 이유입니다. 따라서 그 자체에 비하면 그것은 투쟁의 부분일 분입니다.. 그것을 능가하는 그리고 그것은 태초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진정한 전투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만약 우리가 이 커다란 전투의 일부라면, 그리고 우리가 싸운다면 우리의 자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그분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추상적 이상이 아닙니다. 확고하고도 진짜이며 친밀한 그분과의 일치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 점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우리 온 회가 그리스도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릅니다. 생각, 사랑 그리고 활동들 모두 그분과 그분의 다스리심, 그분의 영광 그리고 그분의 지상 구속사업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펼치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 사제로 사는 다른 이유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혼들 안에 영적인 생명을 가져옵니다.”
 이와 반대로 습관이나 권태로 인하여 주님과 일치하는 영적 생명을 위한 전투를 약화시키면 우리는 단지 핵심적 전투에서 전투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미사, 사제직, 그리고 가톨릭 교리와 그리스도 왕을 희구하는 싸움의 존재 이유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 영적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인 생명은 천주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주실 우리 영혼의 생명에 다름아닙니다. 이 생명은 이 지상에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 생명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천주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영적인 삶은 그러므로 천주를 아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신성, 그의 덕행과 그분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그분을 닮기 위함이며,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순수 관상적 지식이나 성서 신학에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식은 신앙과 은총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분에 대한 초자연적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불타는 애덕 안에서, 우리 주님과의 깊은 친밀함 안에서 피어날 생명의 근본이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영을 진리에 봉헌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영혼과 존재를 말씀하시는 분께… 진리이신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는 것이며…이 삶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나를 믿는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이와 같이, 영혼은 언제나 모든 것이 되신 그분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더해집니다. 그분에 관하여 더 많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더 사랑할수록 그분을 아는 지식안에서 더 발전하게 됩니다. 신앙과 애덕은 서로를 양육하고 따라서 영혼은 신적인 모범을 더더욱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고나서 영혼은 구원의 여정을 방해하는 사슬들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원죄 이래로 타락한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과 연관지으려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만 알았으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었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듯 살아 천주를 잊어버리는 지점에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천주께서 신앙의 지식을 주시고 은총으로 인간이 그분을 닮도록 활동하시는 때에 인간은 모든 것을 돌이켜 그리스도와 연관짓기 시작합니다. 곧 그는 그리스도만을 알고 그분으로 인하여 살며 그분을 중심에 두게 되어 자신을 잊어버리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인의 이상입니다. 이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그분으로 충만해진 영혼의 생명이 되시는 지점까지 모든 난관을 이기게 해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진리이신 그분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참되고 결정적인 자유입니다.


“복된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이와 통교하기 원하시며 이는 우리에게 창조된 선물을 받는 것이다.”

 

이제 천국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 복된 주님께서는 수많은 천사들과 성인들과 같이 완전히 우리 영혼을 채우실 것이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이 이 지상에서 영적인 삶과 함께 시작되므로 우리 구세주께서 단계적으로 우리 영혼 안의 곳곳을 들어올리고자 이미 원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하게도 우리는 아직 이 지상에서 천주를 뵙지 못하지만, 천국에서 얼굴을 맞대고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천주께 대한 전적으로 완전한 지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과 영원히 일치할 사랑은 우리가 이미 지상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애덕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온 힘과 온 정신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봉헌하는 데까지 이르면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 모든 것이 되십니다.
 

이 원대한 생명이 오직 높은 영성가들에게만 가능하다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두와 통교하고자 하십니다. 이 육화하신 말씀의 가없는 사랑의 앎은 단순하게 세례와 견진을 받은 이들에게 내려진 통달의 은사가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3. 영적 생명에 필요한 수단
 

이 신앙의 앎은 우리와 어떻게 통교합니까? 무엇을 통하여 그 앎은 애덕의 삶으로 꽃피워져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합니까? 바로 성사들을 통하여, 그리고 미사 성제를 통해서입니다. 이 은총의 통로들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안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분을 우리 영적 생명의 축,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원천으로 모시게 됩니다.”

 

은총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그분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이 은총이 우리 안에서 커질수록 그분과 친밀하게 나누는 우리 생명은 영혼을 가득 채워 그 무엇도 그분을 우리와 갈라놓을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영성입니다. 이 이상은 그리스도인 삶을 완벽하게 통합시킵니다. 왜냐하면 우리 복된 주님의 위격에 통합되기 때문입니다. 천주의 아들께서는 그 사람의 생명에, 그의 모든 염려와 행위에 축이 되십니다.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이야말로 진정 내적 일치의 원칙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전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영적 생명의 축으로, 우리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의 원천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미사를 위하여 싸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들은 그들의 구세주를 알아볼 수 있게 되어 그분을 더 낫게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위해 싸우는 이유입니다. 영혼들이 그분을 섬기고 왕이신 분과 완전하게 일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1979년 우리 창립자께서 그분의 긴 선교경험을 내맡기신 사제서품의 금경축 때 시작하신 십자군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어떤 깊은 동기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희생의 문제입니다…우리는 십자군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를 쇄신하기 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에, 그 무적의 반석에, 지치지 않는 은총의 원천인 미사성제에 기초를 둔 십자군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교 문명이 다시 꽃피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 문명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도시, 천국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정녕 이 십자군은 우리 것입니다. 영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미사 성제에서 보급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혼과 사회 전체에 통교하시게 합니다.
 한편, 영적 생명을 위한 이 전투가 멈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4. 현대인은 판단기준 없이 스스로를 저버렸다.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현대인을 보면 됩니다. 우리는 현대인이 삶을 구성하는 데 일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데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 더 이상 판단기준은 없습니다. 그는 방향을 잃었고 스스로 안에서 찢겨 지고 갈라졌습니다. 만일 그의 삶 안에 신앙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다면 오직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인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영역에서 이득을 얻고자 합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천주께도 기대지 않고 즐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예컨대, 우리는 현대 과학이 신앙의 판단 없이 스스로를 확신할 수 있으며 대담하게도 신앙 그 자체를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현대 교육과 도덕이 스스로를 모든 원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갈망하는 목적을 추구하여 가장 혼란스러운 부조화로 귀결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 정치인들이 모든 사회적 삶에서 전적으로 신앙과 초자연을 저버리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 복된 주님께서는 아마 현대인의 삶에서 여전히 아주 작은 부분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더 이상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복된 주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삶에서 제거되어 계심을 발견하시는 이 배교의 씨앗들, 그리고 해체와 혼돈으로 이끄는 도덕적 원칙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일치되고 단순한 영성생활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는 무례하고도 도발적인 그리스도의 왕권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이는 사회와 개인에게 주신 그분의 지엄하신 명에 대한 경멸스러운 거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마도 여전히 현대인의 삶에서 작은 부분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분은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향은 이 인간에게 더 이상 완전하게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모든 행위의 기초가 아니십니다… 이 인간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결합은 이렇게 불가능해졌습니다.


5. 교회 내 위기의 뿌리: 세속과 세속의 정신에 대한 개방
 

하지만 오늘날 이 위기를 더욱 극적이게 만드는 것은 교회가 지난 60년간 현대의 이상들을 환영하고, 주님께서는 오직 제한된 영역에만 계시는 세상의 관념 안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종교 자유의 옹호자가 된 이래로 주님의 온 우주적인 존귀하심은 더 이상 인지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 인격을 인간 스스로 다스리는 영역으로 인식하고 각 개인이 제한없이 각자의 양심에 따라 살 권리를 인정하며 효과적으로 교계의 위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인격에 지니시는 권리를 부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며 벌어졌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그리고 참되게 알고 그로부터 영적 생명을 사는 일은 오늘날 교회에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복되신 주님의 존귀하심 뿐 아니라 신성까지 의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이른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명분아래 인간이 주님을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의 위계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신 신성하신 구세주에 대하여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라고 선언한 성 베드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께서 누구에게건 자유로이 주시는 개인적 은총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은 채, 오늘날의 교회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고 참되게, 그리고 그분의 신성과 특권을 지닌 그분의 왕권과 그분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을 아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생명의 삶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빠져 있는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미사만이 아니라 성사와 신앙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복되신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은 위험속에 있습니다. 궁극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이 비극적으로 위태로워진 이것은 바로 교회가 돌이킬 수 없는 결말입니다.
 

우리 창립자께서는 이를 매우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감성적이고 피상적이며 부흥회적인 종교입니다… 이 새로운 종교는 가톨릭적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사회와 가정을 성화하는 데 무익하며 무능합니다.”


6. 무뎌진 복음의 검


 어떻게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재앙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그와 같은 뒤집기가, 온 시대의 교리와 신앙과 반대되는 개념들이 교회안에 잉태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아! 이는 매우 단순한 이유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영적인 생명은 싸움의 이유입니다. 각 영혼이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구하는 이 전투는 또한 무엇보다도 우선 온 가톨릭 교회의 전투입니다. 이는 세속과 교회가 직접 맞대는 일반적 충돌이며 당장 급한 것은 정확하게 영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입니다. 이 전투는 어렵고 고되며 장기전입니다. 교회의 첫 순간, 첫 성신 강림 대축일에 이 전투는 시작되었으며 이 세상이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충돌의 어려움들에 더하여 지속되며 생기는 특별한 난관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지쳤습니다. 점점 모든 요구와 함께 영적 생명의 이상은 희미해졌습니다. 가면 갈수록 가톨릭 신자들은 싸움을 지속하기엔 너무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변화되고 구원되는 주님의 은총에다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라는 부르심에 주저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제약과 그분의 다스리심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영혼 안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거슬러 밤낮으로 공모하는 세속의 계교에 저항하는 데 언제나 피곤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라”(로마 12:2)고 경고했던 성 바오로에게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세속의 공격에 직면하여, 불행하게도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과실이 있는 나약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의 가톨릭 정신은 용기를 잃고, 타협적이게 되었고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노선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세속적이 되었습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 삶의 깊은 특징인 희생은 쇠퇴했습니다.

“더 이상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근본 없는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없는 활동을 선호했습니다.”

 

곧 교의적 정당화가 이 나태함과 피로감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전투는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속의 평화, 모든 믿는 이들 가운데의 우주적 조화를 가톨릭이 세상과 화해했다는 환상아래 믿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며 이에 더하여: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그러나 더 이상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고 근본 없는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없는 활동을 선호했습니다. 그분께서 좋아하시는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활동은 더 쉽고 덜 부담스러우며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더 편안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그리스도인 이상을 갈수록 무시하거나 저버리는 망가진 교회 안에서 저 이상을 살아가기는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성 비오 10세회가 어제와 같이 오늘도 그 대가가 무엇이 될지라도 싸울 의무가 있음을 이해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세속에 순응하기 위하여 주님을 저버리는 위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구세주의 가장 충실한 친구들이 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부터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충실함을 위한 이 싸움은 매일 도전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 비오 10세회가 믿음에 충실하게 남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7. 성 비오 10세회는 온전히 면역력이 있는가?
 

50년간 확장되어 오면서 성 비오 10세회가 잘 자리잡은 탓에 전통이 더 쉽게 유지되고 더 편안하게 보호될 수 있었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진짜 위험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앙)생활은 오늘날 더 쉽고 덜 힘듭니다. 그 어떤 것도 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성생활, 내적 생활 즉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의 의무들은 매일의 전투와 세상에 우리 자신을 타협시키는 기만적인 유혹에 기꺼이 맞서는 투쟁을 요청합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님은 1979년 기념 강론에서 “희생의 개념은 근원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톨릭적 개념이다. 희생 없이는 삶을 살 수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천주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취하시고 《나를 따르라,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0년의 투쟁 뒤의 또 다른 위험은 영혼으로 하여금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미를 상실시키고 더 이상 여전히 필요한 처음 노력의 깊은 이유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약함과 낙담에 스스로를 허락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가톨릭적 생활이 지속적인 우리의 목표로 남아있는 것은 근본적입니다. 그리고 우리 힘 안에서 매일 천주 성총의 도움으로 하는 모든 일은 우리 복된 주님과 함께하는 애덕의 삶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분의 다스리심이 세워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반드시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우리 영혼에 군림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초자연적 망덕으로 지지되는 이 매일의 영적 전투는 만일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남아있기를 원한다면 매우 귀중합니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는 그 분의 또 다른 인성이 되며 그 사람안에서 성자께서는 아버지께 자유로이 맞갖는 영예와 영광을 드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적 생명의 이상이 깊이 우리 것인 한, 우리의 전통을 위한 전투에 대한 충직함은 보장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전투에서 깊은 영적 측면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저 추상적인 투쟁으로 이끌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적 전투는 지성적, 관상적이고 육체에서 분리된 게임 즉, 우리 신앙의 명확성으로부터 조명을 받은 도덕적 삶이 결여된 관념 대 관념의 대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미사성제를 위한 우리 싸움은 심미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 전례가 더 아름답고 더 기도로 가득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하여 방어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수호해야 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반드시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바로 전통 전례가 제대에서 복되신 주님의 사랑을 인간이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것보다 가장 탁월한(par excellence)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랑과 그 희생에 완전히 들어가는 가장 탁월함의 수단은 자신을 바치는 경배를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사를 위한 싸움의 궁극적 이유이며 “전통”이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 영성생활의 이상이 우리에게 깊이 남아있는 한, 날마다 천주 성총이 우리 모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도록 내어 드리는 한, 전통을 위한 전투에 있어 우리의 충직함은 확증되고 활기가 넘칠 것입니다. 성 비오 10세회의 회원들과 신자들을 확증할 이 영으로 진정 활기를 띈 생명 안에서 통합된 이 이상은 그리스도 왕을 섬기는 충실함에 필요한 힘과 활력입니다.


8. 어떻게 마지막 승리를 준비할 것인가?


교회 내의 위기는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더 중요한 점은, 왜 천주께서는 지속되도록 허락하실까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우리는 새 미사의 위험성에 관하여 모든 것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에큐메니즘과 종교 자유 등의 모든 오류들을 드러냈습니다. 무엇을 더 해야할까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통이 다시 한번 영예를 받기에 무엇이 부족할까요?


헤아려 보건대 말해야 할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진리를 설파하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오류들을 부인해야 한다고 계속 말해야 함은 분명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실제로는 주어져야 할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인 전투입니다. 모든 어려움들과 함께 이 상황은 각자로 하여금 우리 주님께 지금까지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심오하고 더 철저한 봉헌을 위해 노력하도록 요청합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자기 봉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확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를 성취하시기 위해 그분께서는 위기가 지속되도록 허용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선하심 안에서 그분께서는 시간을 더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시거나 고상하게 만드시려 하시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더 기꺼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봉헌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선하신 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이용하셔서 우리가 온전히 그분의 신적인 섭리와 사랑에 우리를 내맡길 수 있게 하고자 하십니다. 결국 이 전투는 그분의 전투이므로 승리의 시간은 그분께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한 시험을 당함에 충실해야 합니다. 위기는 우리 복된 주님의 친구들을 더 덕행이 넘치고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분의 적들을 공격하게끔 독려하는 데 필요합니다. 이는 시험이 주님의 은총에 더 기꺼이, 더 개방적으로 그리고 더 순명하도록 만들게 될 영혼들을 일어서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더 거룩하게 만드는 데 필요합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가 우리 다음으로 주님의 싸움을 계속하게 될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불꽃은 다시 타오를 것이며 살아 남을 것입니다.

 

“이 상황은 각자로 하여금 우리 주님께 지금까지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심오하고 더 철저한 봉헌을 위해 노력하도록 요청합니다.”


이 기꺼움을 저는 여러분께 북돋고자 합니다. 미사 성제를 통하여, 열성적인 성사생활, 특별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희생의 정신과 신실한 기도를 통해서, 육화하신 말씀의 지식과 사랑이 우리 영혼 안에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붙드시고 그분의 모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영혼이 그분과 일치하여 성 바오로처럼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 3:8-10)
 

성 바오로의 이 짧은 말은 완벽하게 르페브르 대주교께서 남겨 주신 가장 소중한 것을 요약합니다. “깊고도 불변하는 가톨릭 사제직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우리 주님의 위대하신 기도에 연결된 그리스도교 정신은 그분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영속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어떤 것도 이 외에는 진짜 문제가 아니기에 이것이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천주께서 축복하시기를!


멘징겐에서, 2020.11.1  저성첨례.
총장 다비데 빠글리아라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