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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모기사회(MI) 지도자 신부의 편지 제3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0-07



성모기사회(MI) 지도자 신부의 편지 제3호


친애하는 성모기사회(MI) 여러분

성모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묵주기도를 요청하셨을 때, 커다란 소망과 단호한 결심으로 하자 없는 성심께 순명하면서 우리는 로사리오 성월(10월)로 들어갑시다.


 예전보다 훨씬 더 우리는 지금 끔찍한 묵시록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시아 수녀의 “지금 천주께서는 구원의 최후의 두 개 수단을 주시니, 로사리오(묵주)기도에 대한 신심과 마리아의 하자 없는 신심이다.”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오직 이 수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많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령해야합니다. 우리 기사들은 하자 없는 성심이 알려지고, 사랑받고, 그리하여 성모님의 숭고한 요청이 마침내 실현되어서 모후인 교회의 선익과 많은 영혼들의 구령을 위해서 총장께서 제정하신 전투하는 로사리오 십자군 전선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목하세요: 묵주기도를 단지 암송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신비로운 기도에 숨겨진 보물을 이해하면서 묵주기도에 대한 진정한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 루이 마리 그리뇽은 친히 그의 책에서 이 숨겨진 보물에 관해서, 로사리오의 경탄할만한 신비에 관해서 깊이 묵상하였고,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에서 묵주기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용어로 로사리오를 설명합니다: 묵주기도의 외부적인 ‘몸’, ‘물질적인 면‘은 소리가 나오는 기도이지만, 내부적인 측면인 그 ’영혼‘은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주님의 생애에 대한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다.


이 편지에서는 왜 묵주기도가 이 후반기 시대에 그리도 중요한가요? 라는 질문에 최초로 그에 대한 답변을 해야겠습니다.


묵주는 지금 우리가 완벽한 방법으로서 소박하게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신비를 꿰뚫는, 너무나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우리 주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의 바쁜 남녀들에게 있어서 묵주기도는 우리 신앙에 관해, 아마 모든 신비는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히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신비, 우리 영혼 구령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신비를 묵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입니다.


환희의 신비 (이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오심)는 창조의 중심이 인간이 아닌, (인간이 중심인 현대종교와 비교하세요) 이 지상에서의 낙원이 아니라, 짧은 우리 생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힙니다. 환희의 신비는 우리의 눈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우리를 도와 우리가 우리 삶의 중심으로서의 이 세상의 거짓과 환상을 만들게 하는 유혹을 극복하게 합니다.


고통의 신비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방법, “날마다 네 십자가를 지라.”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수난과 더불어 자신을 깨달아 자신을 잊고 천주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령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랑의 위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신비는 우리 삶 가운데 삶의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부활로 인해 공로가 된 영원한 영광입니다. 이 세 가지 신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영적생활에 관한 모든 필수요소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기초 (임마누엘-우리와 함께하시는 천주), 방법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고 목적 (영원한 영광)입니다. 이 방법으로 묵주기도는 멸망을 향하여 기만적인 길을 걷는 우리를 이 생활의 위험으로부터 비추어 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둘째로, 제가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 기도의 몇 가지 깊은 측면을 제시하고자 함이니, 왜냐하면 이 묵주기도는 천주께서 친히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로 오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마리아를 통하여 천주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이 거룩함으로 가는 가장 짧고 확실한 방법임을 의미합니다!


1/마리아는 우리로 하여금 천주님 신비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묵주기도에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신비 가운데 경탄할 만한 신비인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 신비를 드러냅니다. 천주 친히 묵주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오십니다. 사랑스런 우리 모친의 성심은 지극히 경이로운 선물인 천주님을 성모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십니다!


환희의 신비에서 모든 선의 원천이자 샘인, 특히 가장 훌륭한 우리 영혼 구령의 원천이신 천주 성부를 발견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천주이신 성자께서는 세상에 드러난 천주님의 계시, 그분의 탄생에서 어둠을 흩뜨리신 영적인 태양이시고, 어린 아이로서 성전에서 율법박사들을 비추신 분입니다. 천주성신은 성육신의 신비를 수행하시고 그분의 감도를 통하여 천주님의 은총을 이 세상에 가져옵니다. 성신은 성모님의 (엘리사벳)방문에도 계시고 모친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성화시키고 후일, 아기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동안에도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를 비추시고 성화시킵니다. 
 

여기 우리 눈앞에서 우리의 모친은 게세마네에서 주님이 고통을 겪는 동안 예수성심의 깊이에 눈을 뜹니다. 어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는 예수성심의 고동치는 소리를 들으니, 그분은 가장 거룩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시며, 가장 완전하시면서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공포의 무게와 죄의 끔찍함, 인간의 도덕의 더러움 그리고 역겨운 모욕으로 부서집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든 이러한 공포를 받아드리는 방법에서 우리는 커다란 자비의 몸짓을 봅니다. 주님은 악의 끔찍한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 자신의 생명을 희생으로 이를 파괴하려 합니다. 그리고 산원에서 고통을 겪는 당신의 아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통고의 천신을 보내는 성부의 자비를 같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끝까지 자비로운 사랑의 길을 갑니다. 편태 받으심과 가시관을 쓰심은 행동하시는 천주의 자비입니다. 때때로 주님의 지극하신 성혈과 심하게 부서진 몸 그리고 가시관으로 찔린 주님의 머리의 값으로 어둠이 파괴됩니다. 천주의 자비는 농담이 아닙니다.


감성주의의 성질이 전혀 아닙니다. 천주성자는 죄의 노예가 된 죄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가장 지극한 박해에 자신을 밀착합니다. 천주의 자비는 우리의 구원을 가져왔으나, 그 치룬 값은 얼마인지요! 천주 자비의 이러한 일에서 성신의 특별한 참여로서 이루어지는 십자가 지심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 번의 고통스런 넘어짐 후에 매번 일어서려는 그리스도의 강함이 있으니, 주님이 받아드렸던 시레네 사람 시몬과 베로니카로 부터의 도움과 위안,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계신 통고하시는 모친이 계시니, 이 모든 뒤에는 거룩하신 성신께서 자신을 따로 드러내시고, 구속 사업을 가져와 이 구령사업의 완전한 성취와 궁극적인 완성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각본은 갈보리 위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각각의 천주 위격은 거기에 계십니다.


성부께서 소유하신 천주성자를 아주 끝까지 희생하신 성부가 계시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통하여 ‘죽기까지’를 사랑하시는 성자가 계시고! 십자가 아래에서 지금 서 계시는 마리아의 하자 없는 성심 안에서 거하시는 성신은, 성모님의 고통과 무한한 슬픔 가운데 타오르며 빛나는 성모성심 안에서, 천주님의 영원하신 사랑의 불꽃이십니다!    
 

영광의 신비 안에서 무한하신 사랑은 승리와 구원의 모든 사업이라는 영원한 효험 안에서 나타납니다. 천주님의 영광, 거룩함 그리고 위엄이라는 최종적이고 영원한 계시에서, 부활의 기적에서, 천주 사랑의 승리에서 먼저 우리는 조력합니다. 예수승천은 그분의 신비체이신 몸의 일원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시는 그리스도 승리의 귀환입니다. 그리고 중심적인 신비는 천주 사랑의 불이신 성신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모든 소망은 영원한 평화와 끝없는 행복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영광의 신비는 지극히 완벽한 실현 안에서 이러한 행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때는 하자 없는 마리아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천주께로 귀환을 시작합니다. 마리아의 성광(聖光)은 천국에 있는 모든 천신과 모든 성인들 보다 더 많이 천주께서 친히 성모님을 채워주신 모든 천주님의 사랑의 분명한 계시와 ‘천주께서 으뜸이 되실“ 때에 창조된 질서의 궁극적인 승리와 성취입니다.


2/마리아는 우리에게 창조의 가장 깊은 깨달음과 목적을 일깨우신다.


성모님은 진정 우리가 누구이며 천주님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토마스 성인은 가르치길, 성모님은 모든 인류의 대표이며, 오직 성모님 안에서 우리가 우리의 실현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실현이란, 이것은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며, 성화시키고 최종적으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환희의 신비에서 성모님은 ‘천주님의 자녀’로서의 우리를 우리의 진정한 삶의 기원이요, 근원이며, 샘이요 그리고 거룩한 시작으로서 나타나신다. 성모 안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의 실체를 본다. 우리 삶의 근원은 이 세상이나 피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천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각각의 신비는 ‘시작’을 보여주는데 근원의 연관성과 존재의 샘, 그리고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관련에 있다.


원죄가 있은 후에, 온 세상은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나 ‘천주님의 아들이 되는 자유’로 들어가길 소망하는 가운데 구세주가 오시길 기대하면서(로마서8:20-22) 탄식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동은 영보고지(領報告知)에서 시작되는데 그때 천주성자께서 이 세상에 강잉하심을 천신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할 때입니다. 이 순간에 악마의 노예 속에 사로잡히고 어둠 속에서 상실한 피조물은 재창조되고, 새로운 기초, 새로운 원리, 그리고 새로운 계명 위에 재설정된 압도하는 빛을 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천주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임마누엘) 우리는 새로운 중력의 중심, 삶의 새로운 형태를 찾으니, 이는 우리 안에 천주님이 계시는 것이고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고, 조화롭고, 아름답고, 순수하며 거룩합니다.


성모님의 방문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시작’을 보여주시니, 성 세례자 요한의 성화를 통하여 천주님 은총의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 지극히 높은 선물은 마리아를 통해 요한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성모님의 방문은 성 요한의 거룩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천주님은 변치 않으시다는, 천주께서 일단 하시는 것은 계속하신다는 점에 대해 신뢰를 갖습니다. 만약 최초의 은총 기적이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러면 천주님은 마리아를 통해 사람들을 성화시키기를 계속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영혼을 방문하시고 그 영혼에 성화의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것이며 천주께로 귀환하는 시작입니다.


 예수성탄은 이 새로워진 세상이 마음 깊은 곳이나, 보이지 않는 친밀감에만 존재하지 아니라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기초는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를 기반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영원하신 지혜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나요? 어린 아이모습으로 합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마리아는 수많은 성화와 성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품안에 성자를 안으시고 인간에게 계속 나타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오직 유일한 참된 기반위에, 천주님 은총의 기초 위에서 우리의 생활을 세워야한다는 그런 조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어린이, 작은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서의 제헌은 이와 같이 ‘시작’이 무엇이든지 시작이 진실 되고, 훌륭하며 지혜로워야 되는, 그것이 제헌의 행위이며 희생의 행위라는 핵심적이고도 가장 숭고한 인간의 행동을 우리에게 안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마리아는 이러한 제헌을 한 최초의 사람이었고, 성모님의 희생은 가장 위대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천주께 드렸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영혼 중 영혼, 마음 중의 마음인 자신의 아들을 드렸습니다. 천주님으로부터 천주성자를 받아 드린 지 겨우 40일이었고, 성전에서 주님을 제헌하면서 성부께 다시 돌려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영성생활을 지배해야 하는 커다란 원리에 관한 묵상해야 할 사례입니다. 만약 받기를 원한다면 줘야 합니다! 더 받기를 원한다면, 더 주어야 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다 준 사람만이 모든 것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에서 예수를 찾는 신비에 관한 묵상에서 하자 없는 성모성심은 만약 우리가 성모님 안에서 새로운 영성 생활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이루어야 할 또 다른 본질적인 조건을 가르칩니다. 우리 자신의 힘에 관하여 우리는 결코 이에 알맞은 희생을 할 수 없거니와 우리 삶에 질서와 조화를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계속 우리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분의 얼굴과, 그분의 의지 그리고 그분의 교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좁고 닫힌 세상을 중지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찾는 자가 찾을 것입니다!


고통의 신비에서 마리아는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 길’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천주님에 향해 닮아가야 할 점을 보여주십니다.


천주님을 향해가는 도정(道程)에서 첫 번째 경험은 매우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 고통에 관한 묵상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한 걸음조차 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종도들처럼 우리는 잠을 자고, 유다처럼 우리는 배반하며, 도망가고, 달아나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에 젖어 주님의 발밑으로 우리를 돌려드릴 수 있는 성모님을 향하고, 그리하여 고통당하시는 구세주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들의 죄로 가득 찬 잔을 내게 다오! 내가 그 모든 것을 취한다. 나는 모든 죄 값을 치룬다!” 만약 먼저 우리가 우리의 모든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그분께 고백하지 않으면, 만약 우리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해 자비주심을 허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둥에서의 편태와 가시관을 쓰심은 우리 안의 격렬한 고통, 극심한 비명을 일깨웁니다. “나의 불결함과 나의 교만으로 주님을 자극시키는 자는 바로 나다. 나 자신이 주님의 고문에 참여하였다. 지금조차도 내가 후회함을 느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존재다. 나와 타인의 죄가 얼마나 주님의 신성한 머리와 몸에 고통의 해악을 끼쳤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절망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뭔가를 원하는 어떤 이에게는 고문입니다! 두 번째 경험은 천주님에게로의 확고하고도 지속적인 핵심적인 조건인 양심의 가책과 겸손을 우리 안에 심습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의 길 위에서 마침내 우리는 사랑하는 천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기 시작합니다. 시레네의 사람 시몬과 함께 우리는 실제적으로 주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베로니카와 함께 우리는 연민의 수건으로 주님의 얼굴을 닦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주께 귀환하는 모든 길은 이와 같은 일로 선점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시한 일이지만 그러나 큰 사랑으로 항상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오직 다섯 번째 고통의 신비에서 우리는 반드시 꿰뚫는 새 계명을 받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니, 성모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돕는 일, 구세주의 상처를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마리아의 눈을 통하여 묵상하는 일, 그리고 성모님의 통고의 성심과 함께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께로 가는 우리 삶의 귀환의 핵심적인 행위는 미사의 거룩한 희생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계신 성모님과 함께 서 있으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천주님과 영혼구령을 향한 가득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같게 하시면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시는 것을 듣습니다.


영광의 신비에서 성모님은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 우리의 귀착지가 천주께로 가는 것을 제시합니다. 상모님이 우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하느냐가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하니,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본질적이고 ‘필요한 오직 한 가지’를 쉽게 잊고 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특히, 장애와 어려움이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성모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부활에 관한 묵상은 참으로 심오한 기쁨, 모든 것을 이기신 놀라운 그리스도의 승리, 커다란 경이로움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십니다. 누가 천주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있는가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시고, 우리의 미래 부활을 보여주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생활의 정점에 이르도록, 지극히 높은 계명을 실천하면서 충직하게 인내한다면 우리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새로워지고 영원한 기쁨에 찬 인간성은 천국에서 있을 우리 미래의 영광스런 삶의 모범이자 형태입니다. 사랑을 위한 사랑! 만약 우리가 죽는 날까지 주님을 사랑한다면, 만약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묻힌다면, 그러면 우리도 역시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부터 부활 할 것입니다. 

 

예수승천에 관한 묵상에서 성모님은 왕 중의 왕이 보여주는 승리의 행렬, 성부께로 영광스럽게 귀환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충직한 족장들과 예언자들의 영혼이 천국에서 주님께 어떻게 인사드릴까요? 이것이 우리가 사랑의 희열이라 부르는 모습, 주님 안에서 몰입되고, 주님에 초점을 맞추며, 주님께서 천국에 들어가실 때의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모습, 사랑의 왕 모습에서 보여주신, “발에까지 드리우는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는 황금 띠를 띠셨으며, 그이 머리와 머리카락은 마치 눈과 같이 흰 양털과 같고, 그의 눈은 불꽃과 같았으며, 그의 발은 뜨거운 용광로 속에 든 금속과 같고, 그의 눈은 불꽃과 같았으며 그이 음성은 마치 큰 물(홍수)의 소리와 같았으며, 그 바른 손에는 일곱 개의 별을 가지셨고 .... 그의 얼굴은 찬란히 빛나는 태양과 같더라.”(묵시록1:1316)에서 느낀 당신의 매혹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마침 감동받은 바오로가 느낀 것 같은 감동을 주게 됩니다.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목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땅에 엎드렸고 그날부터 그 후 영원한 죄수, 영원한 종이자 친구이면서 그리스도의 종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날부터 오직 한 가지만이 바오로에게 유익한 것입다:“내 생은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또한 마리아의 가장 큰 소망이니, 이방인의 종도처럼 그리고 성모님처럼 성모님 아들의 크나큰 사랑 안에서 환희 속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성신을 보내심은 우리를 다락방 (Cenacle) 으로 오게 하는데, 그곳에서 성신은 우리 안에서‘성신의 사랑의 불을 붙게’ 하시니 이는 성신강림절 날 성신께서 성모님과 종도들과 제자들을 불붙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종도들과 제자들에 둘러싸여 가운데 계신 성모님을 보게 됩니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 모습인가요! 성신의 불이 마리아를 꿰뚫었을 때 마리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할 수 잇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후일 성모님은 특별히 선택받은 영혼들에게 나타나실 것이고, 그리고 그 모습은 마리아가 누리는 천국 같은 아름다움과 위엄을 설명할 것입니다. 파티마에서, “성모님은 태양보다 훨씬 더 빛났고, 타오르는 태양의 광선이 이를 통과하여 비출 때 반짝이는 물로 채워진 수정잔보다도 더 명료하고 강렬한 빛을 발했어요.” 라 쌀레트에서는, “갑자기 나는 아름다운 빛, 태양보다 더 빛나는 빛을 보았어요.... 그 빛을 주의 깊게 보았어요. 첫째 그 빛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곧 나중에 그 안에 다른 빛이, 훨씬 더 빛나고 움직이는 빛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있음을 알았어요.” 루르드에서 벨라뎃타 성녀에게는, “성모님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랐어요. 왜냐하면 성모님에게서는 믿기 어려운 빛이 왔고 너무 아름다웠으며, 너무나 기적적이고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 설령 벨라뎃타가 가장 완벽한 화가였을지라도, 아무리 가장 완벽한 도구를 썼을지라도 결코 성모님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는 모습이었어요. 벨라뎃타는 중간 크기의 가냘픈 한 사람을 보았는데 매우 어렸고, 아마 20세 전후의 여자였어요. 그러나 이 아름다움과 젊음은 본래 뭔가 특이한 것이었고,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젊음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그 젊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으니, 이는 마치 엄숙하고도 무한한 이해, 어머니의 무한한 선, 그리고 여왕으로서의 군주적인 위엄이 있는 지극히 순수한 동정을 지닌 어린아이와 같은 은총에 참여할 수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서 성모님은 천주님 신비의 무한한 꼭대기에 도달한 첫 인물입니다. 천국을 향한 일생의 여행은 사랑으로 타는 커다란 불꽃과도 같습니다. 성모님은 글자 그대로 사랑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은 성모님의 몽소승천에서 가시적으로 보게 되는데 그때는 모든 인류 가운데 첫 번째로 성모님이 그 목적에 도달하였고 그 후 거기에 이르도록 성모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가져오십니다. 마리아의 죽음(안식 dormitio or repose)은 성모사랑의 풍성함, 사랑으로 인한 죽음으로서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성모님의 사랑은 너무나 심대해서 이 지상에서 성모님을 지탱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영광 (의 신비)은 성모님의 영원하신 승리를 경탄해하는 찬미가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이 천국에 계시고 그러므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상에 남아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성모님이 천국에 계시더라도, 성모님이 결코 멀리 게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도 지금 성모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천국과 모든 피조물의 여왕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어야 합니다. 성모님 안에서 모든 그분의 자녀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받도록 부름 받습니다. 묵주기도 신비의 묵상은 이곳 이 지상보다는 천주님의 신비 안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그 천국에서 살도록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현실이 있으니, 이곳에서의 삶이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으니, 우리는 이곳에서 귀양살이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 안에 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인, “나의 천주님과 내 모든 것” 과 함께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싱가폴, 2016년 10월4일)

칼 슈텔린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