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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정 사목에 관한 시노드에 대한 우려(필독) - 레네 신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2-17



가정 사목에 관한 시노드에 대한 우려


가정 사목에 관한 주교회의 (the Synod of Bishops)로부터 분명한 교리를 듣고자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들려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모호한 보고서만을 들었습니다. 신자들(그리고 비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분명한 교리의 빛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의 분명한 빛으로 선한 목자가 자기 양떼들을 적절한 교리로 먹일 의무가 있으니, 그래서 여기에 도움이 될 몇 가지 간단하고도 간결한 고려사항을 적어봅니다.

1/천주께서 세우신 가정의 본질
2/훌륭한 가정에 요구되는 덕행
3/훌륭한 가정을 준비하기 위해 요구되는 덕행
4/ 혼전에 이루어지는 부도덕, 이것은 좋은 가정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5/ 혼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악은 심지어 가정 그 차체를 파괴할 수 있다.
6/ 훌륭한 가정을 어렵게 만드는 가정 밖의 장애들
7/ 가정이 훌륭하게 되기 위해 줄 수 있는 도움
8/죄의 각본이 이루어진 이후,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천주님의 자비는 회개하라 요구하신다!

* 특별한 상황에서의 특별한 고려 사항들
9/10대들의 임신
10/낙태
11/신중하지 못한 또는 역기능의  결혼
12/깨진 결혼
13/이혼과 재혼

* 잘못된 해결책
15/왜곡된 자비
16/결혼무효
17/잘못된 분별력(안목)

1.천주께서 세우신 가정의 본질


“당초에 사람을 조성하신 자 일남 일녀를 만드시고 이르시되, 이로 인하여 사람이 제 부모를 떠나고 제 아내에게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 이러므로 둘이 아니요, 오직 한 몸이라. 그런즉 천주 결합하여 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지니라. “(마테오19:4-6)

가정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자녀를 낳고 교육하여 저들이 택함 받은 자로서 천국을 채우기 위하여 세운 생애에 걸친 긴 결합입니다. 이 신성한 결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 (혼배성사)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것으로서, 주님은 그 분의 교회인 가톨릭교회와의 신비적 결혼을 암시하려 혼배성사(婚配聖事)를 주십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영적인 결합, 혼인의 결합으로서 “그 누구도 갈라서게 할 수 없습니다.”

혼인은 이러한 결합이 제정된 계약이며, 이 계약의 목적은 “혼인의 행위, 이 혼인의 행위에 대해 한쪽이 반려자인 자신의 짝에게다가 자신의 몸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주는 것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혼인 밖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혼인의 유익함”을 이끄는 첫 번째는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를 낳기 위해 혼인이 생애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자녀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교육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부모의 훌륭한 조언이 필요하므로 부모들이 필요합니다.  착한 자녀들은 착한 부모들의 가장 커다란 보상입니다! “열매로서 저들을 알 것이다”(마테오7;20) 모든 부부가 아이를 가질 수는 없지만, 능력에 따라 자녀를 가질 수만 있다면, “많이”가져야 합니다. (1명이나 2명은 부부의 의무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2명은 두어야 합니다)

혼인의 두 번째 유익한 목적은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주는 상호간의 지지, 특히 정결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정결은 훌륭한 가정에서 특히나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혼인의 세 번째 유익한 목적은 성사(聖事)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처럼 부부간의 보다 높은 사랑, 보다 높은 연대를 보여주는 성사입니다.

2.훌륭한 가정에 요구되는 덕행


요구되는 첫 번째 덕행은 신덕(信德)입니다. 한 가정에서 신앙의 일치는 목적의 일치를 부여하며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이상(理想)을 주어 부부간의 깊이를 일치시킵니다. 이것이 없으면, 많은 중대한 결정(자녀 교육과 교육 이전에 혼인에 관련된 천주님의 계명을 준행하는가)에 대해 분열의 보습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혼인이 궁극적인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에 가는 길, “형제간의 교정”을 통한 덕행의 실천 안에서 다른 쪽을 돕는 길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희생의 실천을 함께 배워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자들에게 상기시켜줍니다.

두 번째 요구되는 덕행은 정결의 덕행입니다. 이것은 충직 (결코 혼인 밖에서는 결혼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며, 천주께서 제정하신 –부자연스런 악은 배우자일지라도 대죄이다) 이어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 열어놔야 되며 생명을 막는 것은 어떠한 것도 허용이 안 됩니다. (피임, 주기법에 의한) 어떠한 절제나 금욕도 포함됩니다.


모든 덕 가운데 가장 커다란 덕인 정결의 덕은 선한 가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으니, 가정이란 “정결의 학교”인 것입니다. 정결은 주고 일치시킵니다. 이것은 부모나 배우자를 위한 온전한 계획입니다. 무엇보다도 천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리고 나서 배우자와 자녀에게 주는 것입니다. 정결은 관대함이니, 이기심과는 반대가 되고, 생명을 주는 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속하게 용서해주며, 천주님 계명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녀들을 양육합니다.

실제적으로 훌륭한 가정이란 매일 이루어지는 가족기도, 즉 아빠, 엄마 그리고 모든 자녀들이 함께 모여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래 걸리진 않지만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규칙이란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고 좋은 가정은 방마다 십자고상과 성화(聖画)가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가정은 세속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좋은 집에는 천주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없어야 하며, 특히 정결에 어긋나는 것들(나쁜 서적, 비디오 등)이 없어야 합니다. 텔레비전 조차도 없어야 한다고 르페브르 대주교께서 충고하셨습니다. 덕행은 자기멸시, 절제 그리고 희생정신 없이는 불가능하니, 자녀에게도 작은 희생을 바치라고 교육해야 합니다.

가정의 첫 번째 목적이 훌륭한 자녀를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톨릭 교육이란 사랑하는 환경 속에서 부모가 먼저 자녀들의 모범이 되어 사랑스런 교정(矯正)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모든 덕행을 실천하게끔 가르치고, 천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훌륭한 부모로서의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훌륭한 가톨릭 가정에서의 부모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아내가 가정에서 일하면서 아버지는 가능한 한 많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큰 축복입니다. 

3.훌륭한 가정을 준비하기 위해 요구되는 덕행


인간은 혼인하는 그 날까지 동정성(童貞性)을 지켜야 하는 것이 천주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불가능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동정의 중요성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에서의 충직성(忠直性)은 결혼 전까지 정결(貞潔)을 지키는 것으로 준비됩니다. 혼인 밖에서도 (타인과) 결혼관계를 갖지 않는 것 또한 같습니다. 동정(童貞)을 가지고 결혼을 한다면, 이는 그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신뢰로서 자신의 충직하고자 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정이야말로 다른 것에 비해 최고의 “결혼선물”이며, 동정은 그 이후에도 신뢰를 주게 하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이 덕행은 정결을 더럽히는 어떠한 것도 피하는, 특히 텔레비젼, 비디오, 저속한 사진, 호색(好色)잡지, 지저분한 대화 및 죄에 빠뜨리는 장소 등을 거부하는 엄격한 정결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행위들과는 분명해야 하며 단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절제해야 하니, 절제란 정결의 보호막입니다. 심지어 약혼관계에서도 적절한 보류로써 동정을 지켜야 하며 결혼행위와 어떠한 친밀한 행위도 오직 혼인 안에서만 적절한 것입니다. 결혼 후에 다른 한 쪽이 제 3자와 관계 갖는 것을 싫어함은, 혼인 전에도 다른 이와 관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신덕(信德)이 혼인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또한 훌륭한 결혼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래의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많은 장소(혼인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일터에서의 사회적 의무, 자녀교육 등)에서처럼 가톨릭 신앙을 깊이 있게 하는 사례입니다. 젊은이들이 저들의 눈 앞에서 영원한 지복직관과 지옥의 영원한 벌을 체험하게 하여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시다. 젊었을 때 신중치 못한 선택은 영원한 구령(救靈)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이 될 것입니다.

훌륭한 혼인은 천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많은 기도로써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 자체가 요구된 덕행, 미래 배우자를 위한 기도, 부부간의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을 갖게 하는 기도를 지켜줍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은 결혼 전에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며, 가정기도를 위해 아름답게 준비하는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훌륭한 결혼은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여기엔 장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결혼 하지 않았다면!) 심지어 어떤 이와 결혼을 고려하기 전에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상의) 장애가 되는 사람과는 친교조차도 맺어서는 안 됩니다.

4.혼전에 이루어지는 부도덕(不道德), 이것은 좋은 가정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신앙의 결핍은 오늘날 너무나 흔하게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오직 자기 만족과 쾌락, 오직 세속적이고 감정적인 사랑만을 찾고, 초자연적인 자기희생과 사랑이 아닌 세속적인 결혼관을 갖게 합니다.
치료책; 훌륭한 교리공부가 필요! (그리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부모의 모범이 필요)

성적 욕망: 지저분한 호기심(TV, 인터넷, 책, 호색잡지….)이러한 것들이 흔히 혼자서 더러운 행동을 하거나 타인과 나쁜 짓을 하게 만들고 이러한 모든 이기심은 결혼생활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과는 반대가 됩니다.
치료책: 죄의 기회를 단단히 차단할 것(TV, 인터넷, 책, 호색잡지….) 그리고 기도와 희생을 실천할 것.

이러한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로 현대생활은 천주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천주님의 계명을 떠난 모든 끔찍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고삐 풀린 육욕의 쾌락적인 악이 어떻게 젊은이들을 사음(邪淫)으로 이끌고, 이것은 첫째에 이은 둘째의 악인 피임으로 이끌고, 또한  (피임에 실패했을 때) 낙태로 이끄는지, 그래서 이전의 죄악보다 훨씬 더 커다란 통탄할 악으로 나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5.혼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악은 심지어 가정 그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


첫 번째 악은 신앙의 결핍입니다: 신앙의 결핍은 이 세상에서 행복만을 추구하게 되고, 사람은 창조된 선을 남용하게 됩니다. 신앙의 결핍은 기도와 희생을 소홀하게 만들며, 그래서 더 이상 치료책을 갖지 못하게 되어 상황은 점점 나빠집니다.

둘째: 이기심과 불결함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쾌락을 찾는 것은 포르노 책자(이는 항상 악한 것이고 기혼자에게도 해당된다)도 포함되는데, 피임으로 이끕니다. 피임은 이러한 육체적 이기심과 불결함을 키우며 낙태까지 이끌고 이 낙태는 아버지다운 사랑과 어머니다운 사랑을 파괴하며 쉽사리 가정 자체를 파괴합니다.

많은 가정에서 자녀들의 교육이 무시된다: 자녀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끔 허용되니, 자녀들의 최소한의 변덕은 이루어지고 결국 이것이 자녀들을 망치며 덕행의 뿌리를 파괴합니다. (덕행은 올바른 이성에 의해 개인의 열정을 통제하는 데에 존재합니다. 열정이 통제되지 않는 곳에서는 덕행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의 악에 대한 (천주님의 질문에 ) 답변을 요구 받게 될 것입니다!

더 심각한 악: 어떤 가정에는 근친상간, 심지어 부자연스런 행위, 소아 성행위 그리고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로까지 가는 악이 있다.

치료책: 이냐시오의 훌륭한 피정을 본 받을 것! 이 피정을 받으면 강력한 가톨릭 윤리관을 갖게 되고 가정기도 등을 갖게 됩니다.

6.훌륭한 가정을 어렵게 만드는 가정 밖의 장애들


성세성사 때에 우리는 “사탄을 끊어버리고, 모든 그의 유혹과 모든 그의 행실을 끊어버린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세상” 안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은 현대의 방송 매체, 저속함, 욕설, 신성모독, 포르노, 추문, 천주께 대한 무관심 등에서 분명히 두드러집니다. 세속이 갖는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죄에 대한 모든 끔찍한 두려움을 잊고서 “죄는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남성의 벌이가 너무 적어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 일터로 나갈 수 밖에 없게 함으로써(이는 실업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직장이 흔히 생활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 이것은 어머니가 자녀와 떨어지게 함으로써 훌륭한 가정을 돕지 못하게 합니다.

나쁜 학교에서, 자녀들이 덕행 가운데 교육을 못 받거나 나쁜 아이들과 만나게 됩니다. 남녀공학은 흔히 죄의 기회가 많습니다. 무신론자 교사들이 아이들 마음에 의문의 씨앗을 뿌립니다.

훌륭한 가톨릭 가정은 체계적으로 세속적이며 나쁜 학교를 경계하고 피해야만 합니다!

거짓 치료책을 경계하라: 전형적인 예가 NFP(자연주기를 이용한 가족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교회의 가르침을 순응하면서 “책임감 있는 부모”로 가정을 가르치는 척하지만, 정상적이라면 결혼관계에서 태어날 아이를 피하게 하는 피임정신을 배우자에게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출산의 회피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임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절제(를 통한 피임)가 적당한 이유(질병 등)가 있는 반면에, 이 NFP는 결혼한 정상적인 부부에게는 규범이 아닌 것입니다! 결혼관계에서 오는 절제는 보다 높은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기도의 목적일 경우에는 잠시 잠자리를 안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오직 기구(祈求)에 전심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동의로써만 서로 얼마 동안 별거하는 것은 좋으나 후에는 다시 동거할 지니, 만일 그러지 아니하면 너희 무절제함에로 기울어지는 인성 때문에 사탄의 유혹을 당하리라.“(코린토 전7:5) 이는 의무(보다 높은 사랑), 질병과 같은 것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단지 짐이 되어 아이들을 안 낳는다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인데, 이는 잘못된 이유가 되며, 그러므로 소죄가 됩니다. 소죄는 쉽사리 대죄의 길로 빠져듭니다!

7.가정이 훌륭하게 되기 위해 줄 수 있는 도움


가톨릭 가정을 위한 두 가지 주요 도움
1/ 훌륭한 가톨릭 교구 공동체: 다른 훌륭한 가정과 함께 많은 부모가 전통전례의 매일 미사에 나는 곳, 소년들이 St Steven’s Guild 에서 복사를 할 수 있고 소녀들이 마리아의 아이들이 될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서로 서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모든 덕행을 키우는 안전하고도 사랑스런 가톨릭 환경입니다.
2/훌륭한 가톨릭 학교: 물론 남녀공학이 아니어야 합니다! 적절한 교리공부와 가르침이 가톨릭 철학과 영성이 함께 스며드는 곳은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에 있어서 부모에겐 엄청난 도움이 되며, 자녀에게도 그러하니, 상호간의 모범과 다른 훌륭한 가톨릭 부모와의 친교로써 덕행을 실천하게 됩니다.
3/서원하는 생활의 모범. 비록 이 세 번째가 되는 도움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결혼은 좋은 것이나, 서원(誓願)생활은 더 좋은 것입니다. 청빈, 정결, 순명의 권고를 받은 신자들의 실제적 모범은 저들의 낮은 수준에서의 덕행의 실천에서 가톨릭 배우자를 끌어드리는 강렬한 힘입니다.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수도자 (그리고 사제)로 하여금 완벽한 금욕을 실천할 수 있게 도움이 된다면, 결혼한 신자들이 이러한 정결의 덕(금욕)을 저들의 결혼 생활에서 실천한다면, 그 얼마나 주님의 은총이 많겠습니까? 희생의 중요성은 또한 수도자들의 모범에 의해 평범한 신자들에게도 강조됩니다. 저들은 이 수도생활 안에서 어떻게 모든 이러한 덕행이 살아있는 신앙, 그리고 수도생활의 핵심인 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에서 흐르는가를 보게 되고, 이 덕행이 훌륭한 가톨릭 가정 한 가운데 있을 수 있고,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8.극적인 원죄 사건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천주님의 자비가 속죄를 명한다!


우리는 천국에 “사랑의 발걸음”으로서 갑니다. 성 토마스는 우리가 외적으로는 길을 우리의 지성에 보여주고 우리의 의지에게 보상과 벌로써 동기부여를 하는 천주님의 법 (그것은 천주님의 계명으로, 천주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자선의 계명에 모두 함축돼있음)에 의해 그리고 내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그 길을 가는 데에 도움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님 법의 모든 세세한 것들에까지 전적으로 신실하셨던 유일한 분이신 원죄 없으신 동정녀를 제외하면, 모두 타락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죄를 덜 지었고 (예를 들어 성 소화 데레사는 오직 소죄만 있었다), 누군가는 더 죄 지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더 극심한 죄에 빠졌습니다. 천주님은, 그 분의 자비 때문에, 그분의 유일한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구세주로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값을 치르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며 영생의 길로 우리를 되돌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극적인 원죄 사건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천주님의 자비가 속죄를 명합니다!

얼마나 많은 극심한 죄를 지었든 간에, 천주님의 자비는 이보다 더 크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죄인들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죄들이 얼마나 크든지 간에, 그분은 그 영혼을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주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섣부른 추정은 안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치길, 어떤 날에라도 누군가 천주님께 돌아온다면, 그분이 그의 모든 과거의 죄들을 용서할 거라고 하셨지만, 내일을 약속하진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 주 어느 시(時)에 올는지 알지 못하니, 너희는 조심하여 지내라.”(마태오 24:42). “하루하루 미루지 말고 한시 바삐 주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의 진노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며 징벌하시는 날에는 네가 멸망하리라.”(집회서 5:7)

죄의 극적인 사건 이후의 큰 원칙은 매우 간단하다: “죄 위에 죄를 더하지 말라!”(집회서 5:5) 다른 정도의 죄들이 있지만, 누구도 절대 그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천주님께 나중에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러한 억측은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정말로 천주님께서는 죄인에게 회두를 하기 위한 시간을 주십니다. (묵시록 2:21) 만일 누군가가 그 사실을 죄를 계속 지음으로써 남용한다면, 천주님께서는 더 이상 시간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은 저의 인자와 인내와 참을성의 무량하심을 경히 여기느냐? 천주의 인자하심이 너를 개심시키고자 하심을 너 알지 못하느냐?”(로마 2:4)

따라서 어떤 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그가 천국에 가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천주님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따라서 “곤경에 빠졌다”는 걸 깨닫는다면, 곧바로 그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심으로 천주님께 돌아갈 결심을 하고,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천주님의 자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에게 율법을 면제시키지는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천주님의 법률을 순종하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그건 너무 어려워. 난 성공할 수 없어.’..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작은 역할을 할 순 없을까요? 우리의 십자가를,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던 그분과 함께 집시다!

천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기도와, 죄의 기회에 대해 완전히 피하는 것과, 지난 죄 때문에 받는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것 (아래에서 보십시오), 고해성사, 그리고 잦은 고해와 잦은 영성체를 하는 확고히 열렬한 삶을 요구합니다.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죄인이 이것을 하도록 도와야 하며, 그를 깎아내려선 안 됩니다. 진실한 회두 이후에 그 사람은 죄인이었으나 더 이상은 죄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누군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능한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열렬히 참회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우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좋은 목자로서 “아흔 아홉을 들에 버려 두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서 그 양을 찾기까지 아니하겠느냐? 이미 그 양을 얻으면, 반가이 자기 어깨에 메고” 라고 하십니다.(루까 15:4-5) 그들은 심지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성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9.십대 임신


그 원인이 무엇이든(간음, 강간, 근친상간…)간에  태어날 아기는 죄가 없습니다! 누구든 앞서의 죄에 더 끔찍한 살인의 죄를 더해선 안 됩니다. 아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종종 천주님께로 진정 돌아오는 것의 시작입니다. 그들의 딸이 낙태를 하도록 압력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 부모들은 딸이 아이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이 아기가 환영 받게 해야 합니다. 딸이 과거의 죄에 보상하려면 앞으로도 많은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 고난에 하나를 더 추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 바오로는 우리가 “선으로써 악을 극복하라!”고 권하십니다.(로마 12:21)


많은 그러한 경우에 도움을 제공하는 Pro Life(생명에 찬성하는)조직들이 있습니다. 이는 훌륭한 선업입니다. 만일 아기 아버지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다면, 친부모 밑에서 아이가 자랄 수 있도록, 결혼은 서두르지 않고 고려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수로부터 부모 둘 다 죄와 죄의 기회를 피하는 것을 배우고, 더 나은 삶으로 진정 돌아가도록 확실히 해야 합니다. (위에서 좋은 결혼 준비에 대해 보시오)

10.낙태


죄가 얼마나 크든지, 천주님의 자비는 이보다 더 큽니다. 이것은 낙태에도 적용됩니다. 낙태는 아마도 현대 세상의 사악함의 전형일 것입니다. 치유는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녀를 사로잡았던 “일곱 마귀”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말구 16:9) 그리고 그녀를 훌륭한 성인으로 만드셨다. “이로 인하여 네게 이르노니, 저에게 많은 죄를 사하여 줌은, 그 많이 사랑함을 인함이니,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함을 인함이니라, 하시고”(루까 7:47)


그러나 그 치유는 진정한 뉘우침, 많은 눈물과 삶의 진실한 변화와 함께 동반됩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혼외관계이든, 불륜이든, 피임이든, 거기까지 이어진 죄의 생활을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보속은 또한 필요하며, 프로 라이프( Pro Life) 운동에 헌신하고, 아이들을 가지고 사랑함으로써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회두의 거부는 끔찍한 마음이 굳어짐과, 현대의 공공연한 죄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항상 거기 있어도 회두 거부로 인하여 양심을 모든 영역에서 침묵시키려고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후의 유일한 해결책은 최후의 심판 (내가 그 때 어디 있게 될 것인가?)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묵상 속에 있습니다. 그 영혼들이 죽기 전에 그런 묵상을 하도록 천주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이미 너무 늦은 후일 것이기 때문이고, “생활하신 천주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가히 무서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헤브레아 10:31)

희생자의 영혼에 의한 기도와 보속은 이 죄에 빠진 많은 사람들의 회두를 얻기 위해 훨씬 유용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바침으로써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진정한 친구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바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1.신중하지 못하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결혼


몇 년이 흐르면 자주 (때로는 훨씬 더 적은 시간 후에!) 누군가는 이성과 신앙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경솔하게 결혼생활에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죄성을 고려할 때 상당히 흔한 경우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고려해야 할 것은 그 상황을 이혼으로써 더 악화시켜선 안 됩니다. 이혼은 종종 그저 십자가로부터 도망가는, 이기주의의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신앙의 빛에 비추어 삶을 보고, 천국이 지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단호히 하늘에 두고, 결혼이 사람이 예상한 모든 행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일상 생활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그 십자가를 바로 그의 가족의 성화(聖化)를 위해 바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실로 그 사람이 선으로써 악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마땅히 찬사 받아야 합니다. 좋은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은 만일 배우자가 좋은 예를 보여주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열렬한 기도의 삶과 덕행으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곳이 가족의 진실한 기도 생활이 훨씬 더 필요한 지점이다. 그것은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고난에도 불구하고 신실해질 은총을 얻는 기회입니다.

12.깨어진 결혼

이혼과 같은 실패가 수반하는 환멸은 배우자들이 진실로 천주님께 돌아가게 도울 것이다: 지상에서 행복을 헛되이 찾고 난 후에야,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유일하게 진실로 영원한 행복 되시는 천주님께 들어올립니다. 그러한 난파된 사고의 해결책은 더 깊은 기도생활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있습니다. 오로지 거기서만 진실한 위로와 천국으로 가는 힘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또 다른 연인을 찾음으로써 악에 악을 더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시길, “나 혼인한 자들에게 명하노니 – 이는 나의 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명하신 바니라 – 아내된 자는 그 남편을 떠나지 말지니라. 만약 갈렸으면 (다른 곳에) 재가하지 말고 그대로 있든지, 혹은 그 남편과 다시 화합할 것이요, 남편도 또한 그 아내를 내어 보내지 말지니라.”(코린트 전 7:10-11)

완전한 금욕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훌륭한 신자의 모범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과 좋은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천주님께 더 큰 은총을 필요로 한다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삶의 어려움을 결혼의 깨짐을 일으킨 죄에 대한 보속으로서 바쳐야 합니다. 보속의 정신은 예수님께서 마르가리타 마리아 성녀께 요구하셨듯이, 예수 성심에 대한 헌신의 핵심입니다.

13,이혼한 사람과 재혼

만약 누가 이혼 후 재혼하였다면,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지게 되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길,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이사야 59:2). 그리고 그 상황을 바로잡을 빛과 힘을 얻기 위해 좋은 이냐시오 피정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악에 악을, 죄에 죄를, 간음에 간음을 더해선 안 된 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멸망하는 데로 인도하는 넓은 문”(마태오 7:13)으로 가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멈추는 것은 두 번째 “파트너”로 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만일 두 번째 결합에서 아이가 생겼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지만, 이것을 죄의 상황을 지속하는 변명으로서 이용해선 안 됩니다. 때로 두 번째 파트너와의 아이들이 완벽한 금욕의 삶, 같은 지붕아래 있으나 침실을 분리하는 것으로써 해결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죄의 기회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엄격한 삶의 규칙을 요구합니다.

이로부터 진실한 영적 삶을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더 강한 미덕을 요구한다: 열정적인 기도의 삶과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자주 받음으로써 속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자비 속에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은 정말로 약한 우리 자신이 완벽한 금욕을 실행하도록 능력을 주신다. 천주님의 자비는 절대로 죄를 지속하게 해주는 허가가 아닙니다!

14.부자연스런 악행들


“천주님은 인간을 올곧게 만드셨다”(전도서 7:29), 비뚤어지게 만들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악행들의 원인으로 천주님을 비난하는 것은 큰 불경입니다 (다른 악행들에도 마찬가지다!). 만일 천주님의 은총으로, 그러한 악행에 빠진 한 사람이 그가 그런 “역겨운 짓”(레위기 18:22)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절망할 게 아니라 신성한 의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한 뉘우침과 영혼을 치유하고 곧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총의 힘을 신뢰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집을 모든 죄의 기회로부터 “청소하는 것” (책, 사진, 비디오 등, 그리고 그런 악행은 많은 것을 발명했다), 죄에 동조하는 어떤 나쁜 무리도 절대적으로 피하고, 미덕의 굳은 삶을 실천하기 위해 수단을 취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 수단이란, 기도, 고행, 그리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자주 받는 것입니다.

15.삐뚤어진 자비


오늘날, 교회는 매우 위중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교회 위계(位階)의 구성원들인 성직자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세상의 정신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들 성직자들은 몇몇 사람들이 성체를 받지 못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낄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간음과 신성모독의 죄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주님의 계명을 에둘러 가려는 다른 방법들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선적 방식으로서, 이를 “자비”라 부릅니다. 성 교회의 조상들은 그러한 주장에 기겁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비뚤어진 자비”라는 이 강한 표현을 사용하여, 죄를 치유하지 않고, 죄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마치 죄 많은 삶이 천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처럼 죄를 덮으려는 자비를 고발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느 특정한 공공연한 죄인들이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회 법을 제거하려는 몇몇의 시도 속에서 이 비뚤어진 자비를 봅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대부모가 천주님의 법률을 따르는 삶을 살고, 가톨릭 교사가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청하는데, 이것은 대부모와 교사 둘 다 아이들에게 모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의 의학적 조언의 도덕성을 신뢰할 수 있도록 가톨릭 교인 의사가 가톨릭의 도덕률을 따르기로 맹세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러한 법률을 제거하고, 그러한 자리를 자신들을 고치길 원치 않고 공공연한 죄의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것은 정말로 비뚤어진 자비이며,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이 괜찮다고 생각하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천주님을 지독히 모욕하는 짓을 계속하는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는가? 그러한 스캔들을 교회에 주는 것이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는가? 자신의 영혼들을 지옥으로 빠지는 위험에 놓는 것이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는가? 그들의 영혼이 대죄에 의해 영적으로 죽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교회의 “살아있는 구성원”들로서 여겨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죄가 영혼에 끼친 손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거나, 죄를 중요치 않은 것,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묵시록의 경고는, “너는 이름으로는 살았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죽은 자니라”(묵시 3:2).

그들이 자신의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길 원한다면, 곧바로 우리가 가장 큰 도움이 돼야 합니다. 하지만 저들이 고치려는 의도가 없다면, 좋은 가톨릭교인들과, 특히 성직자들은 저들의 행위에 저항하고 속죄하도록 열심히 권고해야지, 그들이 괜찮은 것처럼 다뤄선 안 됩니다. 그러한 교정 과정은, 자선의 부족이 전혀 아니라, 자비의 영적인 작업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죄인들을 고치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도와 죄인들의 회두를 위한 고행으로 인한 이러한 진정한 자비의 행동은 많은 개종자들을 얻을 것입니다. 저들에게 선행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고치게 된 그 회개한 수혜자들에게 영원히 감사 받을 일이 될 것입니다!

16.혼인 무효


혼인의 그 근본적 조항을 자연의 창조자이신 천주님께서 직접 정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사의 지위로까지 올리신 계약입니다.  인간은 계약의 “빈칸을 채울 수”도 있지만(예를 들면 배우자의 이름!), 그 조항을 바꾸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근본적 조항이나 (예를 들면 불가해제성) 조건(결혼 조당)을 거절한다면, 그 계약은 무효입니다.

혼인의 욕구는 가장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근본적 조항은 자연과 완벽히 순응하는 것입니다. 천주님께서 직접 인간의 마음속에 그런 욕구를 넣으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법률의 추정”을 결혼에 우호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혼인은 그 혼인에 대해 반대가 되는 상황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는다면 (조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유효한 것으로 간주돼야 합니다. 이 추정의 원칙은 또한 혼인의 불가해제성을 매우 잘 보호합니다. 신성한 결합이 가볍게 의심받아선 안 됩니다. 혼인의 무효화는 그 구체적이고 객관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더욱이, 가족들이 시민 사회와 교회의 구성 요소이므로, 공익이 관련돼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결혼이 무효하다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법정에서 정해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문제는 주교나 그의 대표자가 주관하는 적절한 교회 재판소에서 적절한 신학과 교회법에 따른 소송 절차 후에 판단해야 합니다. 교회의 법률은 수세기의 지혜에 덕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결혼의 신성함 모두가 열정에 휘둘리지 않고 – 그런 문제에선 열정이 강할 수 있다 -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법들 중 하나는 “결합의 옹호자”가 결혼의 유효성에 반대하는 아무 첫 번째 결정이라도 항소하는 의무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무효 선언”은 그것을 입증할 두 번의 재판 이후에만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바티칸 제2차 공의회의 결과로서, 세상에서는 결혼에 대한 무효의 판결(“무효 선언들”)이 크게 증가함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예를 들면 1984년과 1994년 사이에 50만이 넘는 이혼 판결이 있었습니다! 1983년 새 교회법에서 “적절한 분별의 부족”(교회법 1095조 2항)과 같은 모호한 개념들을 도입한 것이 그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무원칙적인 일부 판사들은 전통적으로 보면 경솔했을 것 만으로 판단되었던 혼인을, 즉 절대 무효하다고 판단되지 않았을 결혼들을 “무효화”하고 있습니다. 

 9월8일, 교황 서간 ‘Mitis ludex’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잘못된 판단에 거스르는 법률의 전통적 보호막을 없앰으로써 무효 선언을 훨씬 쉽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결정에 항소하는 것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며, 덧붙여 그 결정을 45일 안에 하는 걸 허락하여 명백히 영원한 삶과 죽음에 대한 그런 문제에 요구되는 신중함이 없는 “빠른 길”을 터놓았습니다. 만일 어떤 합리적인 재판소가 종신형 같은 신중해야 할 결정을 그러한 짧은 과정으로 정한다면, 어떻게 자신의 영원한 삶을 그렇게 짧은 절차에 맡길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이 무료라는 것은 – 몇몇 경우에는 나쁘지 않지만 – 그저 사건의 수를 너무 늘려서 판사들이 이에 합당한 신중함 없이 재판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압박을 가할 것입니다. 게다가 똑같은 교황 서간이 혼인무효에 대한 전통적 근거를 예전에는 전혀 근거가 되지 못했던 다른 원인들과 같은 수준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많은 잘못된 판단이 있을 것 – 예를 들어 사실은 전혀 무효가 아닌데 결혼의 무효를 선언하는 판결들 -을 우려하는 더 많은 이유를 만듭니다. 역사가 이러한 걱정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버크(Burke) 추기경은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소위 “미국의 임시적 규준”이란 것이 있었다고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교황 바오로 6세가 미국의 주교들에게 두 번째 재판을 하는 요구 사항을 면제시키게 해준 특별허가인데, 그것이 이른바 사람들이 “가톨릭식 이혼”이라 부르는 것이 돼 버렸습니다!

더 많은 부정직한 “혼인 무효 선언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더욱 신자들이 교회의 판결로부터 기대할 도덕적 확신을 빼앗을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의심스런 이러한 결정에 기반하여 굳건한 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까?

이것 중 그 어느 것도 자비가 아니며, 오히려 속임수입니다. 무분별한 무효 판결에 대한 보호막를 없애면서 혼인의 불가해제성이라는 교리를 지키는 척한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한 무효판결을 받은 후에 혼란에 빠졌거나, 그러한 신뢰할 수 없는 판결에 맡기고 싶지 않은 저들의 영혼들을 돕기 위해서, 성 비오10세회는 직접 적절하고 신뢰할만한 판결을 얻는 데 요구되는 모든 보호를 가진 전통적 법률을 따르는 결혼 법정을 세웠습니다. 그런 판결이 사실에 입각한 판결이고, - 본성적으로 – 특별한 관할권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 법정은 그런 경우에 신자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것입니다.

17.잘못된 분별(안목)


마지막 속임수는 “분별(안목)”의 잘못된 개념에 숨겨져 있습니다. 책임감의 정도가 있고, 무지의 죄가 완전히 알고 동의한 악의적 죄와 같은 반열에 있지는 않지만, 분별(안목)이 절대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이사야 5:20). 죄인을 참아낸다는 것은 절대로 그런 상황을 승인한다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만일 죄인이 그의 회두를 미룬다면, 교회가 그에게 성세 성사를 주는 것을 미루는 것이 가장 정상입니다!


잘못된 분별(안목)은 시노드의 “보고서”의 이 문장들에서 분명합니다: “실제로 전례적, 목회적, 교육적, 제도적 무대에서 실행되는 다른 형태의 배제된 것 중에서 어떤 것이 극복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배제를 일으킨 것이 죄가 아니라, 오히려 공개적 죄인들을 특정한 책임감에서 배제시킨 것이 교회법이라고 이것이 추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법들을 제거하는 것이 저들의 회개를 도울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잘못된 분별(안목)은 계획된 침묵과 모호함의 분위기에서 번창합니다: 따라서 시노드의 보고서는 가족간의 협력 84번(Familiaris consortio n°84)를 그 부분의 핵심적인 가르침, 즉 이혼한 사람들과 재혼한 사람들이 영성체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지 않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계산된 침묵은 몇몇 사람들에게 “분별을 갖고” 영성체를 주는 열린 문으로서 해석됩니다! 또한 회개가 이혼한 사람들과 재혼한 사람들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속죄가 단순히 첫 번째 결혼을 깬 것뿐만 아니라, 현재 간음한 상황에 대해서도 요구된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야 55:7) 진정한 자비는 진정한 “천주님께로의 회귀”에서 절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 말고, 오직 죄를 두려워하라. 오로지 죄만이 우리의 슬픔의 대상이 되게 하라.”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 3세, p.6, col 2 – sermon sur les statues n°5)

18.결론: 미사의 희생제사, 진정한 자비의 분수


모든 오류와 죄에 대한 보편적 해결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천주님이 직접, 죄 많은 인간을 그의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그만큼 멀리 가신 것, 이것이 진정 최고의 자비인 것입니다. 아무도 성심의 이 자비로부터 제외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모든 이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죄에 머무르며, 천주님을 계속해서 모욕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헤브레아 6:6)는 없습니다. 천주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 모두를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나 천주를 위하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들”(로마 6:11)로 부르신 것보다 더 큰 회두의 호소는 없습니다. 진실로 십자가는 죄에 대한 큰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죄에서 빠져 나오고, 천주님의 계명에 따라 신실하게 살며, 심지어 거룩함의 경지까지 닿게 능력을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은총이 미사의 희생 제사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연민의 성모님, 자비의 어머님, 우리 모두가 진정 주님께 돌아가고, 주님께 신실해지며, 거룩함이 커지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