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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성 사제서품과 사제독신에 관하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08







여성 사제서품과 사제독신에 관하여


질문  요즈음 일부 신학자, 수녀들, 환경론자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은 “수녀에게도 신품성사”와 “사제결혼”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것들은 교회에서 금지된 것인데, 왜 교회는 그러한 권리를 금하는지요?


답변  첫 번째 요점, 문제가 되는 이 “권리”라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성서에 비추어보면 절대적으로 성서 밖의 내용이며 교부들의 주장에도 배치되는 것입니다. 성서와 교부들은 십계명에 요약된 천주님의 권리와 인간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장 큰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네 온전한 마음과 네 온전한 영신과 네 온전한 힘으로 네 주 천주를 사랑하라.”(말구12:30) 그래서 교회 안의 모든 것은 천주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만사가  다 너희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천주의 것이니라.”(코린토 전 3:22-23) 그와 반면에 “인간의 권리”라는 정신은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초점이 되어있지, 천주님이 맞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간단한 말씀입니다: 정의의 미덕은 이웃이 우리에게 빚진 걸 받고자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이웃에게 우리가 빚진 것을 갚는 것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엔 덕행이 필요 없습니다. 도둑들조차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덕행은 당신이 빚진 것을 돌려주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사람의 권리를 설교하는 것은 그의 시기와 계급 갈등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의무 -무엇보다 천주께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천주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의무-를 설교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의무를 완수하고 곧 그 이웃의 권리를 실현시키도록 하며, 그에 따라 평화와 행복이 뒤따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시작부터 잘못되었습입니다. “여성에게 신품성사의 권리”는 없습입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남성에게도 서품 받을 “권리”가 없다. 서품을 주시는 것은 천주님의 선물입니다!
 

 만약 사람이 천주님의 사업에 그의 눈을 열게 되면, 거기에는 지극히 경이로운 원려(遠慮)가 있습니다. 즉 최고의 지혜 속에서 천주님은 물질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는 더욱 더 지극히 경탄할 만한 수많은 깊은 조화와 비율로 너무나 많은 다른 사물을 조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천주님은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큰 별이 있습니다. (안타레스 같은 거대한 별, 이 별이 태양의 위치에 있다면 지구는 그 위치에서 모든 것이 타버릴 것입니다) 왜성(矮星-작은 별)도 있습니다. 목성과 토성과 같은 커다란 행성이 있고 수성처럼 작은 행성도 있습니다. 큰 산도 있고 작은 언덕도 있습니다. 큰 고래도 있고 아름다운 작은 무수한 물고기도 있습니다. 등등. 이러한 경이로운 다양성에 대해 고마워합시다. 이런 다양성은 천주님의 아름다운 사업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심지어 각 종(種)안에서조차도 정확히 똑같은 장미는 없습니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소나무가 없는 것처럼, 심지어 쌍둥이조차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는 쌍둥이를 구별합니다. 천주님은 우리 각각 모두에 대해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천주님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천주님에게 순응시켜야합니다! 우리가 천주님께 지시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그분께 “왜 주님은 이것 혹은 저것을 결정하셨나요?”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주님은 이런 방식으로 혹은 저런 방식으로 행하시니 잘못입니다”라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인물인 욥은 왜 자기가 이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묻지만 그는 결코 천주섭리 안에서 주께서 잘못하신 것이다 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천주님의 손길에서 나오는 그의 고통을 지극히 아름답게 받아들였습니다. 두 가지 시련에 대한 그의 반응은 지극히 놀라운 것이고 묵상하기에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시는 이도 야훼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야훼이시니, 주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1:21)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좋은 것도 받았으니, 나쁜 것(고통)도 왜 안 받겠는가?”(욥2:10)
 

 그래서 최초의 질문은 네 가지 질문 안에서 훨씬 더 고요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재 진술될 수 있습니다.


1/ 천주님에 의해 오직 남성만이 사제직을 가질 수 있는가?
2/ 정결(독신)이 신약의 사제에 대한 요구사항인가?
3/ 왜 완벽한 정결이어야 하는가?
4/ 왜 오직 남성만이 사제직을 가져야 하는가?


 1/ 성서는 첫 번째 요점에 대해 모든 사제가 남성임을 구약 신약에서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아론뿐만 아니라 그의 남성 후손 그리고 그 이전에도 남성이었으니, 아벨, 셈, 아브라함, 이삭 등이 참 천주께 희생제를 제헌합니다. 구약에서 여성이 희생제를 제헌하는 경우를 보지 못합니다. 여자 사제들은 악마를 숭배하는 이교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지, 이스라엘의 천주,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 드리는 경배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종도를 모두 남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들보다도 더 많은 은총으로 채워 주신 자신의 모친을 종도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제직의 업무는 성화은총으로서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성모님이 다른 어느 삶보다도 더 많은 성총을 받았지만 성모님은 사제직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도들에게 있어서, 종도들은 오직 사람을 택하여 안수로써 사제직을 지속시켰습니다. 사제직에 오로지 남성만을 택하는 관습은 모든 교회 내에서 만장일치로 된 것입니다. 모든 세기를 통하여 동방이나 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만장일치는 오직 남성만이 사제직에 임명된다는 것이 천주님의 의도된 계획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더욱이 성 교회는 명백히 그렇게 가르칩니다.    
 

 2/ 구약에서는 사제직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승계되었기에 사제직은 분명히 독신이 요구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구약시대 사제였던 세례자 성 요한이 독신을 유지한 점에 주목해야합니다. 또한 구약시대 사제들이 성전 일을 맡은 일주일 간 내내 성전에서 머무는 동안(Lk. 1:23, 2 Kg 11:6-7, 1 Ch. 9:25…)저들의 아내가 사제 영역에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절제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정결(금욕)을 실천하였습니다. 주님이 종도를 선택할 때부터 -종도들이 주님을 따를 그 시점부터-종도들은 (아내의 동의를 얻었으니 그 아내들은 남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각기 자기 아내를 두고 떠났으며(루까14:26), 예수님의 완벽한 정결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신약의 성당관리자(사제)들은 종도들의 완벽한 정결의 모범을 똑같이 따랐습니다. 성 바오로 친히 결혼을 안 한 것은 분명합니다. 성인은 종도들이 “아내이자 자매”인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코린토 전 9:5) 아내들은 (남편인) 종도들을 따랐으나, 자매로서 생활한 것이지 (그 후에는) 결혼생활로 쓰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인 1세기 당시, 제대의 관리자에 대해 요구된 저러한 완벽한 정결생활은 성 교회가 독신생활에 대한 교회법을 제정했을 때(305년 엘비라 공의회 당시)에 어떠한 반란과 이의제기도 없이 이루어낸 바로 그러한 사실에서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교회법은 모든 이로부터 좋은 일로서 환영받았으니, 왜냐하면 교회법이 제대의 관리자에게 요구되는 복음상의 완벽한 실천에 반대되는 것, 남용이라 생각된 것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대의 관리자(사제)에 대해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면, 교회는 커다란 반응 없이 이 권리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체로 남자들은 이러한 권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바로 제대의 관리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제서품과 동시에 완벽한 정결(독신)생활을 받아들였던 것이며, 저들이 받아들였던 의무에 충직해야했던 것 입니다.


 선택받은 사람 가운데 꽤 적은 수가 결혼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일단 서품을 받으면 결혼의 사용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서품 받은 그날 결혼생활을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아내의 동의를 받아야 했으니, 왜냐하면 아내 역시 이에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죽음 이후 사제의 아내가 재혼이 왜 허용되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서품 그날, 아내 역시 정결에 대해 동등한 서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사후 이 정결서원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는 또한 혼인 전에 나쁜 행실을 한 여성과 결혼한 남성에게 사제서품이 장애가 됨을 설명해줍니다. 이와 같은 나쁜 행실은 그녀가 정결의 준수의무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표시를 해주는 것이며 그럼으로 남편에게 있어 많은 유혹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아프리카, 로마 등지에서 제정된 이와 유사한 법이 있습니다. 교황과 거룩한 주교들은 서방과 동방에서 종도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으로 성직자를 돌려놓으려는 것에 대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꽤 늦은) 7세기 말엽 동방에서는 공의회에서 성직자들의 몇 가지 나쁜 습관을 무너뜨렸고 그래서 서품 전에 결혼을 했던 사제가 그 후 결혼생활을 하게끔 허용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계승자들은 그 공의회의 이러한 교회법 (그리고 350년이 지나서 교회분열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심지어 동방의 옛 전통에도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의회에서 첨가된 교회법을 쉽사리 볼 수 있으니, 그 첨부된 교회법들은 서품식 날 정결에 관한 완전한 요구조건이 있을 때에만 논리적인 것이 됩니다. 실제로 왜 그 공의회가 저들이 서품식 날 정결의 서원을 했던 것을 제외하고 사제의 과부들이 남편이 일단 죽은 후 재가를 금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죽은 바로 그때 저들에게 완전한 정결이 부과되니 -이를 멍에라고 하니, 비록 그리스도의 “감미로운 멍에이자 가벼운 짐”이라는 일부로서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저들에게는 남편의 죽음이 감당하기 무척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주교들이 왜 결혼하면 안 되며 완벽한 정결생활이 요구되는 가요? 주교는 완벽한 사제직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이것이 사제직 자체의 요구조건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왜 주교에게 이것이 부과되어야하는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왜 사제는 사제직을 가진 후 결혼해서는 안 되나요? 만일 완전한 금욕생활이 본래 사제직이 요구 사항이 아니라면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합니다(전에 결혼했던 이들에게도 또한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의 사실들로부터, 초창기 교회 생활로부터, 그리고 고대 교회법으로 미루어 볼  때 완전한 정결은 가톨릭 사제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있어서 요구조건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정결이란 정결에 거스르는 죄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천주님의 왕국을 위하여(루까18:28)” 합법적인 혼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합법적인 관계조차 즉 모든 성적인 관계를 비난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실제로 성 교회는 혼인은 좋으나 완전한 정결 그리고 특히 봉헌된 동정성은 더 낫다 항상 가르칩니다. “좋은 것/더 나은 것” 이 개념은 바오로 성인이 친히 코린토인들에게 가르친 반대개념입니다. 성 교회는 결혼의 고결성, 결혼의 유익한 점, 혼인의 거룩함을 감소시키지 않는 방법으로서 완벽한 동정 생활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강조하는데 항상 조심했습니다.


 그러나 봉헌된 생활을 소박하게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고, 훨씬 더 나은 것이며, 더 거룩한 것입니다. 봉헌된 생활은 거룩하신 것 중 가장 거룩하신 주님이 친히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이 세계로 오셨다는 증표입니다. 주님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거룩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이교도들은 이를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저들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천주님의 손길”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교회 초창기 시절부터, 봉헌된 영혼들의 무리를 보는데(종도행전21:9) 수십만 명의 수도사, 수녀들로 이루어진, 수도원으로 가득 찬 중세시대의 유럽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3/왜 이와 같은 완전한 정결이 요구되는가?

“부활 때에는 장가도 들지 아니하고, 시집도 가지 아니하여 오직 천당에서 천주의 천신 같을 것이요.”(마테오22:30) 죽은 자의 부활 후에 성인들의 생활은 영원히 “천국의 천신처럼”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영이신 천주께 다가가면 갈수록 그는 더 영적으로 되어 저급한 것(돈이나 세속적인 소유물)에서나 저속한 쾌락(혼인)으로 부터 자신을 분리합니다.


 세속적인 일에 대해 잘 규제되고 절제적인 이용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천주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영혼을 낮추게 하고 아래로 당깁니다. 그래서 천주님을 더 사랑하고자하는 관대한 영혼, 천주님의 영광을 “더 위대하게” 추구하고자 하는 영혼(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세속적인 것을 경시합니다. 여러분은 가난과 정결에 대한 복음의 권고를 압니다. 순명에 대한 세 번째 권고는 장애물에서 떼어내어 훨씬 더 거룩함으로 다가가게 하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장상의 가르침 아래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 위에 서게 합니다. 


 복음의 권고에 관한 최고의 모범은 십자가 위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가난한 이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정결하고 육신의 쾌락으로부터 분리된 자가 누구입니까? “당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순명하셨으며, 더구나 십자가상에 죽기까지라도 순명하셨으며”(필립피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순명하신 자가 누구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제이며 희생자입니다!


 자, 십자가의 희생은 사제에 의하여 제대위에서 제헌됩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쓰시길: “우리는 제단을 가졌도다. 장막을 섬기는 자(구약의 유대인)들은 능히 이 제단으로부터 먹지 못하느니라.”(헤브레야13:10) 신약에서 나오는 사제의 희생과 더 일치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교는 서품식 날 사제에게 말했습니다.: “imitamini quod tractatis – 네가 만지는 것, 네가 제헌하는 것을 닮아라.” 그래서 사제가 제대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제헌하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사제는 십자가 위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닮아가야 하는 것이며 복음의 권고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원으로 인한 수도사보다 사제는 더 그의 사제직으로 인해 복음의 권고를 더 실천할 수 있다!라고 사람은 심지어 말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수도사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청빈과 순명을 실천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수도사는 이러한 실천을 위해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지역 장상이 있지만, 이 서원의 정신으로 인해야 합니다. 이는 특히 정결의 권고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왜 완전한 정결이 사제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이유인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제헌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사제의 적절한 행위이며, 사제가 사제직의 특성을 받은 것에 대한 행위이며, 사제 홀로 만의 행위이며 사제서품을 받지 아니한 자는 할 수 없는 행위이며 그의 온 생애에 명령된 행위로서 그로부터 사제와 모든 신자들을 위해 수많은 은총과 축복이 흘러나오는 통로입니다. 그 누가 미사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거룩한 희생의 부요함을 감히 평가할 수 있습니까?


 사제가 미사의 거룩한 희생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사제들은 그러한 상태에서 요구되는 정결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사제에게 있어 결혼문제는) 사제가 다른 더 높은 사랑을 찾게끔 불러일으키는 이와 같은 높은 사랑, 미사의 희생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4/ 왜 남성만이 사제직을 수행해야만 하는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 최고의 사랑행위, 최고의 흠숭행위, 최고의 모든 덕을 실현하면서 세상의 모든 죄를 배상하였으며 모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공로를 풍성하게 펼쳤습니다. (비록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모든 이가 이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하니, 어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계명을 거부함으로써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누가 그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요왕15:13)


 사랑은 주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매시간 성부께 드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위 희생은 천주자비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는 진정 사랑의 “대학살”입니다. 그곳에는 무죄한 희생이 천주자비의 불길로써 연소되었으니, 왜냐하면 천주이신 주님은 연소시키는 불“(Deut. 4:24 – Heb. 12:29)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에페소 사람들에게 천주자비의 신비에 대해 묘사합니다: “장부된 자들아, 너희는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그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였음과 같이할지니라. 저 당신을 희생하심은 생명의 말씀을 인하여 그 교회를 성세의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사 써 거룩하게 하시기를 위하심이며, 그를 당신을 위하여 흠점 없고 주름살 없고 또한 그런 것의 그림자도 없는 영화로운 교회를 만드사 그로써 그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기를 위하심이니라.”(에페소5:25-27)


 “천주는 사랑이시라”(요한 1서4:8) 바로 이 천주의 신비, 거룩한 성삼위 신비는 자비의 신비입니다. 성 육신은 더 깊은 자비의 신비이며,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구원은 자비의 신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성 교회의 신비로운 결혼이니, 이는 마치 이브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와 형성된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누가 교회를 대표했습니까? 마리아였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이브로서 새 아담의 조력자입니다. 새로운 이브로서 마리아는 교회 아주 초창기 시절, 이를테면 성 유스틴, 성 이레나에우스 그리고 그들을 이어 다른 모든 이들이 찾아낸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마리아께 아들을 줍니다.:“여인이여, 이는 네 아들이니다.”(요왕19:26)


 미사의 거룩한 희생이 십자가의 바로 그 희생의 제헌을 재현하는 것이기에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미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신비적 결혼의 성사이므로, 사제는 그리스도-신랑의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직 남성(신랑)만이 신랑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합니다: “Vado immolari pro vobis -나 너희를 위하여 제물이 되고자하니”(성 금요일 전례)


 왜 오직 남자만이 사제직을 수행해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성들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역할과 유사한 다른 것,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는 성소를 가지고 있으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는 가운데 기도와 희생과 거룩한 생활로써 아이들이나 아픈 이들, 어려움에 처한 온갖 영혼들의 생명을 양육하는 것, 그들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게끔 하는 것입니다.


[1] Except St John, whom the Tradition teaches us was the “Virgin Apostle”. Thus St Jerome says about him at the foot of the Cross: “Virgo virginem virgini commendavit – the Virgin-Christ commended the Virgin-Apostle to His Virgin-M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