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리

Home > 신앙과 교리 > 미사강론

제목 십자가의 길 - 성모통고첨례(2015-03-3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4-03



십자가의 길-성모통고첨례(2015-03-3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


성 주간(聖 週間)기간에 기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모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만큼 그리스도와 함께 그 수난을 깊이 함께 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성모님 만큼 완전히 동참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 교회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 즉 성 금요일 1주일전인 성모 통고 축일인 금요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건들을 기억해봅시다. 복음서에서 보여주듯이 (마테오26:20, 마두14:17, 루까22:14)주님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에는 오직 열두 종도(사도)밖엔 없었기에 성모님은 최후의 만찬실에 안 계셨습니다. 유다스는 식사가 끝나기 전에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열한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동산으로 가셨으니, 그곳에서 우리 주님은 체포되었습니다.


복음서에는 “문제(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려두고 도망 하니라.“(마테오26:56) 종도들은 어디로 갔나요? 성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성 요한도 똑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니,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고위사제에게 알려졌고” 그리고 고위사제의 재판정(裁判廷)에 들어갔으며 자기를 따라서 베드로가 들어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요왕18:15-16) 풀턴 쉰 주교는 그 “세베대(Zebedee)어업회사는 고위사제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공급자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성 요한을 보게 되는 다음 장소는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였습니다.

그래서 고위사제들에 의해 주님이 수난을 당하신 후, 성 요한은 일의 진행을 알리려고 성모님께 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도망가지 아니하고, 성모님은 함께 한 거룩한 여인들과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게끔 가보자”. 그리고 나서 성모님, 성 요한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은 함께 빌라도의 법정에 갔습니다.


성 요한은 이 재판을 매우 상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는 눈으로 목격한 증인입니다. 빌라도가 주님을 군중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하며 보여줄 때 그때서야 마침내 성모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그 분의 모습을 볼 때 그 성모님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주께서 받으신 게 분명한 시련인, 군인들의 침과 예수님의 뺨에 난 매질을 성모님은 분명 보았습니다. 성모님은 바리새인들의 격양된 증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저자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못박으라”라는 소름 끼치는 외침을 들었을 때 성모님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이러한 외침은 성모님의 심장을 찌르는 칼과 같았습니다!

그리고서 성모님은 자기 손을 씻는 빌라도의 비겁함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우리 주님을 보았습니다. 성모님은 소수(小數)그룹에게 가서 길 위의 주님을 만나자고 지시하셨습니다.”성모님이 혼절(昏絶)하신 곳”이라고 불리는, 갈보리로 가는 그 장소가 아직도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군중 위로 점차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마침내 가까이에서 주님을 볼 수 있으리라 했으나 갑자기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가까이서 보게 되니, 슬픔으로 복받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결코 달아나지 않고 가자고 친구들을 재촉하면서 마침내 그 분을 따라갔으니, 성 요한이 회상한 것처럼 십자가 아래에서 처음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가깝게 다가갈 때, 그들은 주님의 옷이 벗겨진 것을 보게 되고 태형의 정도를 보게 되니 가죽채찍으로 인해 온몸이 찢겨져 만신창이가 되고 커다란 고통만이 있으니, 이사야 예언하시길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데 한곳도 없이, 온 몸이 다치고 멍들고 상처투성이로다. 그런데도 치료  받지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을 바르지 못하는구나.“(이사야1;6) 그들은 못을 보게 되고 그 못으로 인해 주님의 거룩하신 몸이 어떻게 매달리는가를 보게 되며, 주께서 매번 숨쉬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이 성모님을 고통 받게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닙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성모님은 아들에 말합니다:”아들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하였느뇨? 보라, 네 부친과 및 내가 애통하여 너를 찾았노라.“(루까2:48) 만일 아들이 범죄자로서 죽음에 이르는 벌을 받는다면, 어머니는 가족에 부끄러워 “왜 이리 우리에게 이리한단 말이냐?”라고 아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 주님께 저러한 질문을 두 번하지 않았으니, 주님은 죄가 전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똑같은 답변을 주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부(父)의 일이 있는 곳에 나 마땅히 있는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루까2:49)

주님은 성 금요일 성가(聖歌)에서 부르듯이, “수난을 바치면서” 십자가에 달린 상태로 성부의 사업에 몸을 바칩니다. 성부의 뜻은 주님이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성 이냐시오 말씀하시되, 그리스도는 고통을 받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 이것이 성부로부터 받은 계명이다.”아무도 내 생명을 내게서 빼앗을 이 없고, 오직 내가 스스로 생명을 버릴 권(權)도 있고 다시 취할 권도 있으니, 이 명령은 내 성부께 받았노라.“(요왕10:18) 그리고 성부의 이 같은 계명에 순명하였습니다. “죽기까지 순명하사, 십자가에 조차 죽으시고 …“(필립피2:8)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에 의해, 바리새인에 의해, 로마인에 의해 우리들에 의해 수난을 받는다는 사실에 많은 관심을 위해 둔 것이 아니라, 저들을 위해, 로마인들의 회두(回頭)를 위해, 우리 모두의 회두를 위해 심지어 바리새인들의 회두를 위해 고통 받는 사실에 관심을 두셨다고 성 어거스틴은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이것이 그 분께서 천국에서 강림(降臨)하신 목적입니다. “인자는 생명을 해하려 오지 아니하고 오직 구하러 왔노라.“(루까9:56) 이것은 “그 분의 때”(요왕12:27), 온 인류와 온 세상 역사의 정점이었습니다. 경배, 감사, 배상과 탄원의 숭고한 희생의 제헌, 영혼 구원의 순간, 악을 이기는 선의 숭고한 승리, 우리의 죄를 위해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그 분 자신을 제헌하심으로써, 돋보이는 모든 은총을 영혼들에게 주고자 하였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부의 사업이었습니다: “내 부(父)의 일이 있는 곳에 나 마땅히 있는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루까2:49) 성모님은 오랜 기간 동안 이 해답에 묵상해왔고 그걸 잊지 않았으니,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 아들이 있으니, 그 아들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성부의 사업을 완벽한 방법으로 수행함으로써, 성부의 뜻을 완벽히 실현하고자 합니다! 성모님은 분명히 구원의 신비를 이해했으며, 온전히 동의하였고 자신을 위해서 이 엄청난 수난을 받아드렸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천주님을 중지시킨 아브라함의 팔보다 잘 하셨으나 갈보리에서는 이러한 희생제헌을 중지시킬 천사도 없었으니, 왜냐하면 여기 천주님의 완벽한 양,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이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어린 양은 자신을 불태워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러한 구원의 위대한 신비, 우리 구속의 위대한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끔, 그 뿐만 아니라 성모님이 행하셨던 그 깊이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성모님께 요청합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죽어야 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기 위해 우리가 죄에 죽는“(로마6:11)것일 때, 저 구원의 신비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기 위해, 일어서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하나의 희생이 될 때, 우리는 “저와 함께 고난을 당할지니, 이에 우리는 저와 더불어 또한 영광스럽게 되리로다“(로마8:17) 우리가 통고(痛苦)의 성모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모님이 느낀 것처럼 느끼도록”성모님께 간청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인류 역사의 이 지극히 중요한 순간, 천주성자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순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은 3일째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음은 그 분의 성심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귀한”지를 보여줍니다: “너희는 비싼 값에 구매(購買)되었느니, 그럼으로 너희는 육신으로써 천주의 영광을 현양(顯揚)하며…“(코린토 전 6:20) “선조로부터 상속받은 너희의 헛된 생활에서 너희가 구원되었음은 금이니 은과 같은 부패할 물건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무죄하고 무구(無垢)한 고양(羔羊)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은 바라..“(베드로 전 1:18 -19)

우리 눈앞에, 우리 마음의 눈앞에 주님의 십자가를 항상 지키고 있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죄를 배상하려 하시는 지극히 선하신 천주님을 어찌 촉범할 수 있으리요? 어찌 우리가 그 분의 고통에 감히 또 고통을 주고자 하려 합니까? 이 크나큰 은총을 무시하는 것은 모든 황폐함의 원인이 되니, 예레미야 이르되 “온 땅이 황폐함은 이들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에레미아12:11)

십자가의 중요성을 인식함은 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이성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은 온 인류 역사의 정점이요, 모든 창조의 정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혈의 완벽한 희생,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천주께로 돌아가고, 성 삼위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는 매번 제헌되는 미사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매회 행해지는 미사, 심지어 장엄미사의 아름다움이 없는 평미사 조차도 십자가의 희생과 함께 하는 참되고 본질적인 미사인 것입니다. 미사는 성 삼위께 무한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십자가의 희생에서 오는 모든 공로를 우리 영혼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미사는 다음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그 분과 우리가 일치되기 위해서, 우리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지상에서)일치시켜줍니다.
 
그럼으로 미사가 지니는 희생의 특성이 숨겨질 때, 무시될 때, 때때로 부인(否認)될 때, 이는 성 교회에 대해 매우 분명히 행해진 해악(害惡)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례에 있어서 모든 변화가 희생을 분명히 드러내는 점을 감소시켰습니다. 저들은 미사를 식사, 공동식사로 만들었기에 더 이상 속죄와 화해, 경배와 감사의 지극이 거룩한 희생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영혼들은 풍성한 은총을 더 이상 받질 못하니, 이는 은총의 원천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무엇을 공격해야 할 것을 알며 언제 미사를 공격할까를 알았습니다. 악마는 “십자가 예수의 철천지원수”(필립피3:18)입니다. 미사의 변화 속에서 악마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성모께, 동정녀 마리아께, 통고의 성모님께, 십자가의 거룩한 희생, 미사의 거룩한 희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혈의 희생에 대한 깊은 이해와 헌신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 드립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위대한 사랑, 항상 위대한 사랑을 갖게 해달라고 성모께 간청하여 성 루이 마리아 그리뇽 몽포르트가 이야기 하듯이, 우리가 진실로 예수의 진정한 친구, 십자가의 친구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 (성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