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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적전쟁에서 우리의 자세- 오순 주일(2015-02-1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2-22

 


영적전쟁에서 우리의 자세-오순 주일(2015-02-15)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비에 관한 바오로 성인의 놀랄만한 서간을 접하게 됩니다. 성 교회가 아브라함, 즉 놀랄만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민족들의 신앙의 아버지가 되신 그분의 아침기도를 읽게 하고 알게 함은 유익한 것이니,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참 신앙을 가진 모든 이들의 아버지이신 아브라함은 천주께 대한 위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놀랄만한 자비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특히나 자기 아들인 이삭을 천주께 바치기 위해 죽여서라도 바치려 하려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는, 천주님의 계명에 대한 순명(順命)에서 나오는 천주께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진실로 아브라함은 주님이 가르친 바를 실천하였습니다;” 아들이나 혹은 딸을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합당치 아니 하며…  “(마테오 10:37) 아브라함은 위대한 신앙과 사랑을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가치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 천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헤브레아 11:6)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비가 없으면 천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하니, 바오로 성인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 설령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신앙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진대 아무 것도 아니로다.“(코린토 전 13:2)


 왜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사랑이 필요합니까? 기본적으로 천주님은 “빛”이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간에서 천주께 대한 두 가지 놀랄만한 “정의(定義)”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우리들이 듣고 또한 너희들에게 전하는 보고는 이것이니, 천주께서는 빛이시며, 그 안에는 조그마한 어둠도 있지 아니하다.“(요한 1서 1:5) 또한 말씀하시길, “천주는 사랑이시니라. 사랑에 머무르는 자는 천주 안에 머무르며 천주 또한 저 안에 머무르시니라.“(요한 1서 4:16)


 “천주는 빛이시다”라는 의미는 태양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니라 천주께서는 영적인 빛이시며 진리의 빛이시니, “그 빛이 모든 이를 비추더라”(요왕1:9) 무지란 마음의 어두움을 뜻합니다. 진리가 마음의 빛이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왕14:6) 천주님은 최고의 지성이며 최고의 진리이십니다. 이러한 천주님의 진리는 우리 자연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기에 바오로 성인은 천주님이 “접근할 수 없는 빛에 사시느니“(티모테오 전 6:16)라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예, 천주님은 우리가 그 빛으로 들어가도록, 그리하여 천주님을 직접 뵈올 수 있는 초자연적인 지복직관을 갖도록 설계하셨습니다: “당신은 생명의 샘이 있고 또 당신의 빛에서 우리가 빛을 보기 때문이로소이다. “(성영 35;10) 만일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의 경탄을 끌어당기면 천주님의 비전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기에 이는 우리의 영원한 지복직관이 될 것입니다!


 천주께서는 또한 사랑이십니다! 예레미야 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나는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 때문에 너에게 자애(慈愛)를 오래 베풀어 왔노라. “(에레미야31:3) 천주께서는 이 지상의 낙원에 첫 번째 남자와 첫 번째 여자를 먼저 두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반역(反逆)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제헌하신 그 분의 유일하신 독생자를 구원자로 주셔서 놀랍게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로마 12;21)일을 하셨습니다. “천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유일한 독생 성자를 주셨으니.“(요왕 3:16)


 그래서 고마움으로 가득 찬 성영의 저자는 “나는 주님의 은총들을 영원히 노래하오리다.“(성영88;2) 그리고 사랑 받는 요한 종도는 “사랑이란 이것이니라. 곧 우리가 천주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주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당신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한 속제(贖祭)로 보내신 것이니라. “(요한1서 4:10) “우리는 천주를 사랑하느니, 대저 천주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이라. “(요한 1서 4;19)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신이 아니며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조성한 것이 아니며 천주께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너희는 주께서 천주이심을 알아야 할찌어다.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께 딸렸으며 그이의 민족, 또 그이의 목장의 양들이로다.“(성영99:3) 이는 분명해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허나 현대 이 세상은 인간이 천주를 창조했음을 주장하고, 천주로부터 독립된 인간인 척을 하며, 천주님의 진리의 빛에 대해 인간의 지성을 바치길 거부하며, 천주님 사랑하길 거부하고 있으며, 천주님의 법규를 거부하고, 인간이 만들지 않은 어느 법이나 질서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성” 찾아보십시오. 천주께서 우리를 조성하시고 우리에게 육체 안에 “인간의 본성”을 주셨으니, 영혼과 육체 안에 기능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어떠한 법규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천주님을 흠숭(欽崇)해야 하며 육신은 반드시 영혼에 굴복해야 하며, 우리의 정열은 이성에 굴복해야 하고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며 우리가 정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원칙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에 따르는 의무인 “인간 본성”이란 이러한 관념을 부인합니다. 이를 너무나 거부하기에 마치 모든 이들은 자기 자신의 성을 선택할 수 있다 하는 듯, “성(남성, 여성)”에 대한 현대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DNA 세포가 우리에게 주어지듯이,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의 구별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이와 같은 현대인의 거부는 모든 종류의 부자연스런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19세기 때 곰(Gaume)이라는 훌륭한 신부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한국인들을 위해 살짝 의역했습니다. 원본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 대해 익숙한 프랑스인들을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만약,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이 혁명의 가면을 벗긴다면, 여러분은 그 혁명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혁명은 대답할 것입니다. “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나에 대해 말하지만 극소수만이 나를 알고 있다. 나는 이 반란을 일으킨 자도 아니며 군주제를 전복하여 공화국으로 만든 자도 아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한 왕조를 전복한 것도 아니며 지나가는 공공의 무질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폭동의 구호를 외치지 않으며 혁명의 분노도 표현하지 않는다. 바리케이드를 쳐서 피 흘리며 싸우지 않고 프라하(체코의 수도)나 샤먼(중국 푸첸성의 도시)의 탱크도 아니다. 나는 로베스피에르, 레닌, 스탈린도 아니다.(원본은 당통, 마라) 이들은 나의 자식들이지 내가 아니다. 이들의 행위들은 나의 업적이지 내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사건들은 지나가지만 나는 영원한 상태로 있다”


 “나는 인간이 조성하지 않은, 그리고 그 곳에서 그 분이 왕이며 동시에 천주라는 어떠한 질서도 증오하는 바이다. 나는 천주의 권리를 부정하는 인권을 선언하는 자이다. 나는 천주의 의지를 대신하여 인간의 의지를 갖다 놓는 종교적 사회국가의 기초자이다. 나는 천주의 왕관을 벗겨내고 천주의 자리에 인간을 갖다 놓는 자이다. 그래서 나를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건들이 진행되는 연고(緣故)이다.”


 곰(Gaume) 신부님의 이러한 말씀은 혁명이 무엇인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세계에 혁명이 얼마나 많이 발전되었는지, 공산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이 세상 대부분 국가에서는 천주님의 법이 전혀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대부분 국가는 천주님의 법규에 의해 분명히 견책되고 금지된 낙태와 같은 잘못된 법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몇몇 국가는 “낙태에 대해 권리가 있고 동성애에 대한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잘못된 저런 일에 어떻게 권리가 있을 수 있는가요? 똑 같은 일이 동시에 옳고 그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주님은 무고(無辜)한 자를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은 낙태에 대해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이른바 “인권선언”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천주님이 배제된 인간의 선언”이라는 도표(圖表)이며 “나는 섬기지 않겠다. 나는 천주의 계명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외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듯이 이 세상에는 거대한 영적 싸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나는 섬기지 않겠다”라고 한 악마의 반란 때부터, 아담과 에와의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난 후 시작되었으며 세상종말 때까지 계속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천주께서 친히 이 아름다운 예언서에 양편을 묘사하셨습니다: “너와 이 여인 사이에 또 너의 족속과 이 여인의 후손 사이에 내가 원수를 맺어 주노니, 그는 너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요, 너는 그의 발 뒤꿈치로 물려 하리라”. (창세기3; 15)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합니까? 무관심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천주님께 냉담하고 있는 바로 그 사실은 그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성세로서 우리는 마리아의 자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며 “ 그 여인의 씨(후손)”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과 그의 행실과 모든 유혹 등 기만(欺瞞)과 간교(奸巧)함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왕국과 어두움과 증오를 거부하고 단호하게,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의 빛과 사랑의 왕국을 위해 살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악마의 머리를 으깰 것이라는 그 여인의 편이 되고 그분의 후손(씨)가 되기 위해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가톨릭신자들은 세상과 이 세상의 왕자(악마)을 회유하려 합니다. 저들은 더 이상 악마와 싸우려 하지 않고 천주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 합니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이 같은 정신은 이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시입니다. 바오로6세 교황은 공의회 폐막일인 12월 7일 강연에서 직접 말하길, “공의회에 직면한 과제는 이것이다. 인간이 천주가 된 사람의 종교이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천주 친히 사람을 조성하신 천주님의 종교를 도전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충돌? 파문? 이런 것이 일어날 수 있겠다만 사마리안의 옛 이야기가 공의회의 빛이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우리는 그 어느 누구보다 인간을 섬겨야 한다”  이와 같은 말들, 특히 마지막 말은 지극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단호히 참된 종교, 천주 친히 사람을 조성하신 천주님의 종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成肉身)이 되신 종교를 선택하였고 인간이 천주가 된 사람의 종교를 거부하였습니다. 빛은 어둠을 쫓아 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요왕 8:12) 그분은 불신과 죄의 어두움을 쫓아냅니다. 그분 홀로 어둠과 죄로부터 영혼을 치유하시고 빛과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죄인을 미워하지 말고 죄를 미워하라고, 죄로부터 죄인을 구하길 애쓰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싸우는 무기는 육체적 것이 아니라 오직 적루(敵壘)를 무너뜨릴 만한, 천주로 말미암는 견고한 무기니라. 우리는 궤변과 천주께 대한 인식을 거슬러 일어나는 모든 보루(堡壘)를 분쇄(粉碎)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기 위하여 모든 이지(理智)를 포로로 삼노라.“(코린토 후 10:4-5) 이슬람교와 참 종교인 가톨릭종교를 대비(對比)해보면, 이슬람은 이슬람교를 반대하는 이를 죽이라고 할 것이고 가톨릭인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이들을 개종하게 힘씁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저들이 회두하게 끔 자신을 희생하고자 합니다.


 이 거대한 전쟁에서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총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성총을 얻을까요 우선, 기도와 묵상(默想)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이요 사랑이신 천주님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님의 내적 생활의 신비 속에서 지성을 통하여 아들을 낳으신 천주 성부를 보게 되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는 (사랑과)자비로써 성신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묵상은 이 위대한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불타게 합니다. 묵상 이 자체가 천주님의 선물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총을 요청해야 합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 그 이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그 이상으로 주시니,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전쟁에서 필요한 성총을 요구하는데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고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싸워야만 하고 천주께서는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아르크의 성 Joan(쟌다르크)은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이점은 더 더욱 두드러지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최우선이며 우리 구원을 위한 가장 필요한 영적인 무기인 것입니다.


 기도와 같이 움직이는 두 번째 무기는 죄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벗어나게끔 해주는 확고한 의지와 의식적인 결심입니다. 이와 같은 결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어떠한 조건이나 제한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죄는 분명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음탕함과 또한 온갖 정결치 못한 것이나 탐욕은 너희에게 있어 말에라도 오르게 하지 말고 마땅히 성도답게 할지니라.“(에페소 5:3)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 주변에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총의 상태에서는 죄와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죄는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에 대해 절대적으로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나약해진다면 즉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더러 우리의 결심을 굳세게 해달라고 빌며 죄에 굴복되지 않게끔 해달라고 간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지극히 기쁘게 하는 이러한 기도를 받아들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 속에는 우리의 성화보다도 더 커다란 바람이 없기 때문입니다.“천주 원하시는 바는 너희의 성화(聖化)니 너희는 음탕(淫蕩)한 것을 멀리하고“(데살로니까 전 4:3)


 세 번째 무기는 보속과 희생입니다: “누 만일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자기를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 (루까16:24) 사순절이 곧 다가옵니다. 이 기간은 단식을 하고 잠을 줄이며 기도와 독서를 많이 하는 시기입니다. 금요일은 소재를 지키도록 하십시오. 사순절뿐만 아니라 연중 내내 지키도록 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아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그분을 항상 생각하고 그분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망토(품) 안에서 저러한 보속과 희생의 행동을 행해야 됩니다. 그분께 끊임 없이 기도를 하고 중재를 청원하면서 그분과 가깝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며 우리의 상태를 정화시키고 순수하고 충실하게 남아있게끔 해주며 우리 천주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하고 겸손하게 남아있게끔 해 줍니다. 성부님의 망토(품)안에서 여러분들은 안전합니다. 성모여, 성모님의 발끝아래 뱀의 머리가 으깨지는, 악마를 이기는 성모님의 승리에 우리가 동참하게 하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 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