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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의 의미/The Pope's notion on Resurrection(2014-04-20)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9-17



부활의 의미/The Pope's notion on Resurrection - 부활절(2014-04-20)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저 우리는 그리스도 죽은 자 가운데로 조차 부활하사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저에게 아무 권력도 가지지 못함을 아는 도다.“(로마6;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중에 먼저 나신 자 이시니.“(콜로새1:18) 즉 육신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가는 첫 사례입니다. 영생은 영혼에 필수적이나 육신으로도 넘쳐날 것입니다. 성인들에게는 저들의 몸이 영혼의 영광과 기쁨에 참여할 것이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을 주목해보면, 저들의 몸은 저들의 영혼과 일치될 것이며, 영원이 영혼과 재일치 되어 남게 됩니다만 저들의 여건은 매우 불행하여 “생명”이라는 이름이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형벌이요, 쓰여진 그 의미에 있어서 “고통” ”저주"입니다:“그럼으로 무도(無道)한 자들이 법정에서, 죄인들도 의인들의 모임에서 버티지 못하리라.“(성영1:5) 저들은 서 있지 못하는 의미에 있어서 “일어서지”못할 것이며, 설령 저들의 영혼이 몸과 재결합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파멸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할 때, 오로지 세상 종말 이후 영원한 상태 여건을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정의로운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이들을 “옳다”라고 인정해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모든 이들의 모형이며,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원인이시며, 인간으로서 영생으로 들어간 첫 번째 나신 분이며, 천주이신 그 분은 생명(요왕6:14)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들의 비천한 몸을 변하여 당신의 영광스럽게 되신 몸과 같게 하시리라.“(필립피3:21)

죄가 사망의 원인이므로, 성 금요일에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죄를 이기고 승리하신 것이요, 부활주일에서는 죽음을 이긴 승리의 원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과 희생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이 영광스런 부활의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그 분의 공로는 모든 이들에게 풍성히 넘쳐납니다만 모든 이가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의 공로 세우신 은혜로 인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일치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서 일치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천주님의 선물입니다:“대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입(注入)되었느니라.”(로마5;5) 그러나 천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차례가 되어 “너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모든 힘과, 모든 뜻으로 상주 네 천주를 사랑하고, 또 네게 가까운 자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까10:27)가 되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개념이 있는 데 궁극적인 끝, 목적(목표)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목표)로서 모든 사물보다 우리 주, 천주님을 우위에 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한계없이 지향됩니다. 이것이 궁극적이요, 근본적인 목표 입니다. 그래서 성 교회는 가르치길, 인간이 아무리 천주님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분은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가 점점 더 그 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경향으로 기울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천주 안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게 될 때, 여기에서 오는 어떠한 과장, 지나침(exaggeration)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천주님 안에서 어떠한 믿음을 갖는다 하더라도, 무수한 소망을 갖는다 하더라도, 천주께 대한 무수한 사랑이 있다 해도 지나친 법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주님은 객관적으로 보아 분명히 무한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요, 도움이 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느 피조물에 둔다면, 피조물이 무한히 선하고 사랑스런 것이 아니기에, 즉시 무질서에 빠질 것인즉, 왜냐하면 인간이 이 같은 피조물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란 천주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 목적으로 향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단지 수단에 불과한 사물한테 인간이 그 목적을 둘 때, 모든 파괴가 뒤따르는 무질서가 있게 될 것입니다. 목적은 수단의 척도입니다. 피조물은 우리가 목적을 이룰 만큼의 수단으로써 사용해야만 합니다. 피조물이 우리가 이루 고자 하는 목적에 방해물이 될 때는 우리를 그 피조물에서 분리시켜야 합니다. 수단은 그 척도에 따라, 즉 저 수단이 우리를 우리의 목적을 이끄는 그만큼 그 안에서 사랑 받게 됩니다만 목적은 척도없이 사랑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중간 기착지를 통하여 가듯이 우리는 수단을 통하여 갑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순례길에 있어서 지상이라는 중간 기착지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지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처럼 우리는 결국 휴식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성인들은 천주 안에서 휴식합니다. 우리는 작별할 때, 신자들에게 평화를 빌게 되는 그 분 천주님 안에서”평화 안에서 평안”이 있기를 빕니다. “천주의 나라는 먹고 마심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신으로 말미암는 의화(義化)와 평화와 즐거움이 있느니라.“(로마14:17) 그러나 “천주께서 말씀하시길 악인에게 평화가 없다 하셨도다.“(이이사야57:21)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쓰시길 ”우리는 여기서는 영원히 머무를 곳을 갖지 못하며, 오직 장래의 그것을 탐구하느니라.“(헤브레아13;14) 그리고 성인께서는 족장(가부장)의 모범 사례를 제시합니다:”저 아브라함은 신앙을 가져 언약하신 땅에서도 타국에서와 같이 같은 언약의 상속자들인 아사악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서 기거하였느니라. 대저 저는 천주를 그의 건축자와 창조자를 모실 견고할 도읍을 기다리었음이니라.“( 헤브레아11:9-16)


…신앙에 따라 모든 이들이 죽었으며…자기들은 이 세상에 있어 방랑자들이며 나그네임을 고백하였느니라. 대저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자기는 본향을 찾는 자임을 나타내느니라.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기회도 있었느니라. 그러나 저들은 보다 더 나은 본향, 곧 천상의 것을 사모하느니라.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저들에게서 천주라 불리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시느니, 대저 저들을 위하여 도읍을 본향으로 예비하였음이니라."(헤브레아 11:9-16)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으로 가는 도정, 순례길에 있습니다. 이 지상에 영원한 장소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의 모든 것을 스쳐 지나치는 것이지 지상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실(信實)한 신자는 복된 보상과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면서 온 마음을 다하여 천국을 향해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 같은 희망을 품고 많은 위안을 찾으면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일상생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만일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희망이 다만 현세 생활에만 그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이니라.“(코린토 전 15:19) 그러나 오직 이런 현세 생활만을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인께서는 이렇게 쓰십니다:“우리는 증인들의 구름으로 인하여 둘러싸이었으니, 우리는 우리를 무겁게 하는 모든 것과 우리를 옭아매는 죄를 벗어버릴지니라.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싸움을 항구(恒久)히 행할 것이며, 신앙의 근원이신 자이시며 또한 그를 완성하게 하시는 자이신 예수를 거울로 삼아 우러러볼지니라. 저는 당신을 위하여 준비된 즐거움 대신에 치욕(恥辱)을 무릅쓰사 십자가를 감수(甘受)하셨으며, 지금에는 천주의 어좌(御座) 우편에 좌정(坐定)하시느니라.“(헤브레아 12:1-2)

우리는 여기서 “세속적인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신실(진실)한 신자 사이에 주요 차이점을 감지합니다. 어거스틴 성인께서 오늘 성무일도(聖務日禱)조과에서 말씀하시듯이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 입니다. 저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세속적인 사물에 둡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우들은 이 세상과는 분리되며 천국을 목말라 하고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시(現時)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장래의 영광에 비할 바 못 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노라.“(로마 8;18)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 가운데 참여하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가 되어 거니는 자 많으니라. 그들의 최후는 멸망이로다. 저들은 배(腹)를 신(神)같이 위하고 –-자신의 배만 채우고-- 수치스러운 일을 자랑으로 여기며, 지상의 것만을 탐하느느라.“(필립피 3:18 – 19)

이 같은 위대한 진리들을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니, 첫째, “이 눈물의 고별 안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기쁨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며, 희망을 가져다 주는 이러한 기쁨이란, 바오로 성인께서 말씀하시듯이:”희망에 있어 기뻐하고, 환난에 인내하며, 기구에 항구(恒久)할지라.“(로마 12:12)


또한 둘째로, 오늘날 진행되는 가톨릭 교회의 전체적 위기의 뿌리가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물과 목적을 향한 이 같은 의도적인 전환입니다. 프란치스 교황은 교황좌(敎皇座)에 오른 초창기 말씀하시길, 오늘날 자신의 가장 커다란 관심이란 “실직한 젊은이와 외로운 노인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 큰 문제들, 수 백만 명의 신앙의 상실, 심지어 성직자 수가 감소하는데 따른 신앙의 상실 같은 것은 거론조차 안 하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부터 고통 받는, 즉 세속을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고통 당한 사실을 반대한다 함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교황이 선정되는 것은 오히려 놀랄 만한 것입니다.


자기 의무와 진정 씨름해야 할 교황이라 한다면, 그 교황은 많은 사람 가운데, 특히 헌신적인 신자들 안에서 지지와 찬성을 얻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세상 사람과 치열한 싸움을 벌렸듯이 교황은 세속적인 사람들을 치열하게 반대하는 정신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를 시성(諡聖)하려고 밀어 부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빛과 영원의 빛으로 저들이 교황으로 있을 때의 행위를 본다면, 현 교황이 어떻게 아씨시의 스캔들을 일으킨 저 교황을 시성(諡聖)할 수 있습니까? 거짓 신을 숭배하는 불교도들에게 교회를 내주었고 코란에 키스를 한 교황이었으며, 때때로 스캔들이 있는 공적인 미사에서, 즉 부적절한 의상을 걸친 원주민 여성과 춤을 추며, 합당한 존경심 없이 성체가 분배되고, Maciel 신부와 스캔들을 일으키는 성직자들을 보호하는 교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오늘날의 잘못되어 가는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한쪽으로 제쳐지고 주목을 끌지 못합니다. 세상은 잘못된 신앙에 박수를 보내는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영원의 빛 안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말씀하시길:”내가 죄를 지었으니, 내 앞의 해(害)를 돋구리오. 이렇게 말하지 말라. 지극히 높으신 이가 참으며 갚으시리라.“(전도서5:4) 다시 말해서, 몇몇 사람이 죄 가운데 시간을 낭비하고 천주의 계명을 무시하는 가운데, 주님이 보속할 시간을 주시면서 징벌을 미룬 것이 때문입니다. 무서운 무시(無視)입니다.


어거스틴 성인은 우리에게 경고하시길, 천주님이 징벌을 참으면 참을수록 그 징벌이 더 갑작스럽고 더 무서울 것이라 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이 오늘날 많이 몰아칩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파스카의 신비에 대한 신학”이라 부르는 오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파스카의 신비”와 같은 옛 언어 안에서 저들은 새롭고 매우 깊은 오류를 감추는데, 이는 그게 아니라 이단입니다. 이 오류는 우리가 이미 “부활한 생명”에 속한다는 그럴듯한 흉내를 내면서, 모든 것, 모든 성스런 행위에 “성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래서 칠성사의 특별성과 칠성사가 갖는 특별한 유효성과 성총을 파괴하면서, 즉 의미 있는 성사의 내용을 비워 가면서, 실제적으로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차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의미”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심으로써 칠성사가 각각 갖고 있는 매우 특별한 권능이 있습니다:영혼을 정화시키는 권능, 성총을 주는 권능, 영혼이 올라가서 성화되게 하는 권능 그리고 특히 성체 안에 있으니, 그곳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현존입니다.


만약 전례의 모든 행위 하나 하나를 “성사”라고 한다면, 성경 낭독과 분향, 성수 뿌리기 등 등, 이것을 성사인 것처럼 말한다면, 이것들은 성사에 관한 ‘준성사’이지 “성사”가 아닙니다. 준성사(準聖事)는 헌신적으로 사용될 때 만큼 은총을 주시만, 특별한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이러한 준성사를 칠성사와 별 차이 없게 생각하게 만들며, 결국 칠 성사의 의미를 보편적인 흔한 행위로 까지 감소시킵니다.

이 같은 현대 신학은 이해하기가 무척 복잡하지만, 현대 신학교에서의 이 가르침이 매우 보편화되었기에, 우리 현 시대엔 매우 흔한 일이 되었으며, 많은 이들 특히 성직자들의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만약 현재의 사제가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면, 신자들은 신앙에 굶주릴 것이며, 흔히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 성총을 풍성히 주십사 하고 기도합시다. 주께서 종도들에게 성총을 주셔서, 수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신앙이 보존되고 충실히 남아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을 충실히 따르고 그 분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과 분리되고 천국으로 향하게, 특히 사랑하는 천주께로 향하려는 은총을 주십사 하고 간청합시다. 그리스도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총을 주시어 많은 영혼들의 회두(回頭)를 간청합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프랑소아 레네 신부(성비오10세회 아시아 관구 소속 사제)


The Pope's notion on Resurrection


My dear brethren,
“Christ rising again from the dead, dieth now no more, death shall no more have dominion over him” (Rom. 6:9). Our Lord Jesus Christ i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Col. 1:18), i.e. the first to rise to eternal life for the body. Eternal life is essentially in the soul, but it will overflow on to the body: for the Saints, their body will participate in the glory and joy of the soul and will live forever.


Note that for the damned, their body will be reunited with their soul, and remain reunited with it forever, but their condition will be so miserable that it is not worthy of the name “life”: it is everlasting punishment, “torment”, “condemnation”: in that sense it is written: “Therefore the wicked shall not rise again in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uncil of the just”(Ps. 1:5): they shall not “rise”, in the sense that they shall not be standing, they shall be crushed forever, though their soul will be reunited with their body.


Thus when we speak of “life everlasting” we speak essentially of the condition of the just for eternity, after the end of the world. Our Lord Jesus Christ is Th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all those who will go into Life Everlasting. He is the Model for all of us, and the Cause of our salvation. As man, He is the First-Born unto life everlasting; as God He is The Life (Jn. 6:14) and the source of every life. He “will reform the body of our lowness, made like to the body of his glory, according to the operation whereby also he is able to subdue all things unto himself” (Phil. 3:21).


As sin is the cause of death, so is the Victory over sin by the Sacrifice of the Cross on Good Friday the cause of the victory over death on Easter Sunday. Thus our Lord Jesus Christ has merited for us this glorious resurrection by His Passion and Sacrifice. His merits are over-abundant for all men: yet not all men will rise glorious. Why? Because to benefit of His merits, we must be united with Christ: and this is by Charity. Charity is a gift of God: “the charity of God is poured forth in our hearts, by the Holy Ghost, who is given to us”(Rom. 5:5). But Charity requires that we in our turn should “love the Lord [our] God with [our] whole heart, and with [our] whole soul, and with all [our] strength, and with all [our] mind: and [our] neighbour as [our]selves”(Lk. 10:27).


Here is a very important notion: that of ULTIMATE END. We should love the Lord our God above all things, as our ultimate end. The ultimate end is willed without limit: it is ultimate. Thus the Church teaches that one cannot love God too much: He is infinitely loveable, we should always tend to love Him more and more! So when a man puts his ultimate end in God, he should not fear any exaggeration: we cannot have too much faith in God, too much hope in God, too much love for God! Because God is objectively infinitely trustworthy, helpful and loveable.


But if man puts his ultimate end in any creature, since creatures are not infinitely good and loveable, then there will be immediately a disorder because he will love such creature too much. Creatures are means towards the ultimate end, God. When one puts one’s end in something that is merely a means, and not an end, there is disorder, with all the destruction that follows. The end is the measure of the means: we must use the means in as much as they help us attain our end, and detach ourselves from them in as much as they put an obstacle to our end. The means are loved according to that measure, i.e. in as much as they lead us to our end; but the end is loved without measure.


We pass through the means as a man travels through intermediary places towards the goal of his travel: we are on earth as on a pilgrimage to Heaven. Then we rest in the end, as when one has arrived to the goal of his travel: the Saints thus rest in God. Thus we wish to the faithful departed that they may “rest in peace”, rest in God, in whom we have peace. “The kingdom of God is not meat and drink; but justice,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Ghost” (Rom. 14:17), but “there is no peace to the wicked, saith the Lord God” (Is. 57:21). Thus St Paul writes: “we have not here [below] a lasting city, but we seek one that is to come” (Heb. 13:14). And he gives the example of the Patriarchs: “by faith he [Abraham] abode in the [Promised] land, dwelling in cottages, with Isaac and Jacob, the co-heirs of the same promise. For he looked for a city that hath foundations; whose builder and maker is God… All these died according to faith, … and confessing that they are pilgrims and strangers on the earth. For they that say these things, do signify that they seek a country. And truly if they had been mindful of that from whence they came out [Abraham came out of Ur in Chaldea], they had doubtless time to return. But now they desire a better, that is to say, a heavenly country.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th prepared for them a city” (Heb. 11:9-16).


This is an essential aspect of the true Christian life: we are pilgrims here below, on a pilgrimage towards heaven. We do not have a lasting place on earth: we all pass through and do not stay on earth for ever; thus the true faithful TENDS towards Heaven with his whole heart, looking forwards to the blessed reward and everlasting joys. In this hope he finds much consolation and strength to carry his daily crosses in this world. But if he forgets about Heaven, then, as St Paul says: “If in this life only we have hope in Christ, we are most miserableof all men” (1 Cor. 15:19).


But we do not live only for this life; rather as St Paul writes: “therefore we also having so great a cloud of witnesses over our head [=looking at all the Saints in Heaven], laying aside every weight and sin which surrounds us, let us run by patience to the fight proposed to us: looking on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faith, who having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now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Heb. 12:1-2).


We touch here the main difference between “worldly people” and the true faithful of Christ. As St Augustine says (today at Matins), “worldly people are the lovers of this world”, those who put their ultimate end in earthly things. But the true faithful of our Lord Jesus Christ is detached from this world, and thirsts for heaven, not fearing the cross because he “reckons that the sufferings of this time are not worthy to be compared with the glory to come, that shall be revealed in us” (Rom. 8:18). The true faithful is a lover of the Cross, in which he participates in the Victory of Christ; but the lovers of the world are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Whose end is destruction; whose God is their belly; and whose glory is in their shame; who mind earthly things” (Phil. 3:18-19).


It is important to meditate on these great truths, first because we find there the true joys we can have “in this vale of tears”: the joy that hope gives, as St Paul says: “Rejoicing in hope. Patient in tribulation. Instant in prayer” (Rom. 12:12). But also secondly because at the root of the whole crisis of the Catholic Church today there is this “love of the world”: this deliberate turn towards earthly things and purposes.


Did not Pope Francis say at the beginning of his pontificate that for him the greatest concern today was “the jobless youth and the lonely elderly;” should not a Pope have greater concerns? For higher problems, such as the loss of faith of millions, even the loss of faith by members of the clergy? Given the opposition that our Lord Jesus Christ suffered from the “world” – i.e. from the lovers of this world – it is rather alarming to find the Pope as “man of the year” for Times magazine.


 A pope who would really tackle his duty would indeed find support and approval among many, especially among the devout faithful, but he would most certainly find fierce opposition from worldly people, as our Lord Jesus Christ found fierce from the worldly ones of his days, Pharisees, Pilate, Herod and the like. Truly holy Popes like St Pius X were despised by the world, and bitterly attacked. St Pius X said that the mark of the true Church was that she was “One, Holy, Catholic, Apostolic… and persecuted.”


It is the same love of the world that pushed for the canonisation of John Paul II and John XXIII: but if one looks at their pontificate with the light of Faith, the light of eternity, how could be canonised the Pope of Assisi, who gave a church to the Buddhists wherein their worshipped their false god, the Pope who kissed the Koran, the Pope whose public Masses were sometimes scandalous (e.g. with dancing native women certainly not properly dressed) and where communion was given without proper respect, the Pope who protected Fr. Maciel and other scandalous clerics, etc.? But those considerations of Faith today are brushed aside and not attended.


The world applauses and this is what counts… but not in the light of eternity. The Scripture says: “Say not: I have sinned, and whet harm hath befallen me? For the most High is a patient rewarder” (Eccli. 5:4). In other words, because He delays the chastisement, giving time for penance, some people abuse of this time to continue in sin and ignore God’s Law. Frightful neglect: St Augustine warns us that the more God waits to chastise, the more sudden and frightful is his chastisement. Sudden death strikes many today, and nobody pays attention.


There is another great error in our days that is called “the theology of the Pascal Mystery”. Under old words, such as “Pascal Mystery”, they hide a new and very deep error, nay heresy. This error practically denies the difference between time and eternity, pretending that we are already in the “risen life”, emptying the sacraments of their value, by using the word “sacrament” for everything, for every sacred action, thus destroying the specificity of the Seven Sacraments and their special efficacy and graces. External actions, especially in the Liturgy, do signify spiritual actions: the external worship signifies the worship of the soul, the adoration of the soul to God…


But above this general “signification”, there is a very special power in each of the Seven Sacrament, by the institu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power to cleanse the soul, power to give grace, power to elevate and sanctify the souls, and above all in the Holy Eucharist, there is the Real Presence of our Lord Jesus Christ. Now if one makes of every action of the Liturgy a “sacrament”, thus speaking of the reading of the Scripture, of incensing, of sprinkling with holy water, etc. as if they were sacraments – they are “sacramentals” but not “sacraments”: they give grace in as much as they are used with devotion, but not with a special “power” – then one sees no more the difference with the Seven Sacraments, and one ends up by reducing the Sacraments to these common actions.


This modern theology is more complicated to understand, but is very common in our days, and undermines the faith of many especially in the clergy, since it is quite common in the modern seminaries. And if the very modern priests have not the right faith, then the faithful are left starving, and often are led astray!


So today, let us pray that the Risen Christ grant us abundantly his grace, to be faithful to Him, to His teaching, as He gave it to His Apostles and as it had been kept for centuries and centuries faithfully in the Catholic Church. Let us ask for the grace to detach ourselves from this world and to tend towards heaven, towards God loved above all and without measure. Let us ask for the grace of conversion of many souls, to give them this immeasurable treasures of Christ. May the Blessed Virgin Mary grant us to rejoice in the Lord always. Amen.


Fr. F. Laise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