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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08. 새 교리문답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9-01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8. 새 교리문답

8. The New Catechisms

 


 

“저들이 우리들을 보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는 등의 의견이 가톨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음을  들은 적이 있고 또한 이를 계속해서 듣고 있다. 과연 과장된 것일까? 현대주의자들이 교회 곳곳에 침투하여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오! 아니다, 낡고 진부한 방식을 바꿔 버렸기에 그대들이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인데 거기에는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이제는 과거에 기도했던 방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찍이 그러한 티끌을 제거해 버리고 지금 현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또한 갈라져 나간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개방했어야 했다..... 그래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는 저들은 조심하지도 않고, 조금 더 과감한 이들은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가진 사람들끼리 소집단으로 뭉쳐서 공식적으로 시인(是認)하기 시작했다. 카르도넬(Cardonnel) 신부는 새 그리스도교 문화권을 다니며 하는 말이 ‘하느님을 보편 군주로 삼았던 기존의 초월성’에 의혹을 품어야 한다고 강론했다. 공공연하게 롸지(Loisy)의 현대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성 가정(聖 家庭)에서 태어나 배운 교리문답은 신앙의 뼈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교 문화는 기껏해야 신자본주의로 보일 뿐이다.” 또한 수에넨(Suenens) 추기경도 교회를 자기 기호에 맞게 고친 후 ‘가장 광범위한 신학적 다원론을 향하여 개방해야 한다’고 말했고, 진리를 가장 강하게 믿어야 할 부분, 조금만 믿어야 할 부분, 그리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또 다른 부분으로 나누는, 즉 중요도의 순서를 정해서 분류해야 한다고도 했다.


  1973년에 파리의 대주교관에서 베르나르 페예(Bernard Feillet) 신부는 ‘성인(成人) 그리스도인 양성’이라는 깃발 아래 공식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졌다. 생명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정복당했으니, 우리 모두 역시 정복당할 것이다. 이 사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신앙이 합리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방금 말했듯이 신앙이란 결국에는 불합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파멸하리라는 것을 의식하며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으로서, 만유(萬有)를 거스르는 반항의 절규임에 틀림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나는 위와 같은 종류의 사안(事案)을 무척 많이 인용할 수 있으니, 그것들은 여러 차원의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어느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른 어떤 것은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그것은 가톨릭인들의 지력(知力)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신문을 통해서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다면 예외적인 남용으로 생각하여 각자의 신앙이 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부터 가르쳐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교리문답집이 자기 자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두가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많으나 적으나 1966년에 발행된 네덜란드식 교리문답의 영향을 받은 여러 가지 새 교리문답집은 너무나 그럴싸한 거짓이었던 까닭에 교황은 추기경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하여 그것을 연구 및 고찰하게 하였다. 1967년 4월, 그들은 롬바르디(Lombardy)의 가자다(Gazzada)에서 모임을 가졌다. 위원회는 10개 항목을 지적하고는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교황청에 조언하였다. 그 항목들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았던 점은 바로 거론하는 방식이 공의회 이후의 분명하지 않은, 애매한 형식을 따른다는 점이었다. 위원회가 소집되었던 1967년 4월보다 좀 더 일찍이 고찰했었더라면 새 교리문답집들에 대해서 말 그대로 단죄하고 네덜란드식 교리문답에 대해서는 금서목록(Index)에 올렸을 것이었다. 관련된 오류나 생략이 신앙의 본질을 손상시킨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렇다는 것일까? 네덜란드식 교리문답은 천신(天神)을 무시하고, 인간의 영혼이 천주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원죄에 대해서는 원죄가 우리의 원조(元祖)에게서 후손 모두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에게서 감염되는 일종의 전염병인 것처럼, 악이 지배하는 인간 공동체에 섞여 살면서 인간에 의해 물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서 확언하는 것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없다. 또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주께서 죽으시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성부께서 주님을 보내셨으며 상존성총이 회복되는 속량(贖良)이라는 말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사는 희생제사가 아니고 만찬으로서 드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적 현존 혹은 성변화의 실현을 명료하게 단언하지도 않는다.


  이런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의 무류성과 교회가 진리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완전히 의미가 없어졌으며 ‘계시된 신비를 천명하고 확립하는’ 인간 지성의 능력에 대해서도 의미가 없어졌다. 말하자면 이러한 까닭에 불가지론(不可知論)과 상대주의(相對主義)에 도달한 것이다. 성직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사제직이 최소한으로 작아진 까닭에, 주교직이란 ‘하느님의 백성’이 주교들에게 통치해 달라고 맡긴 위임 통치로 여기고, 그들의 교정권(敎政權)에 대해서는 신자 공동체가 지키는 믿음을 재가(裁可)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교황이란 완전하고 최고이며 보편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주님의 세 위격에 관한 신비인 성 삼위일체를 제시한 것도 부족하다. 위원회는 성사의 효험, 기적의 정의(定義), 그리고 죽은 직후의 영혼의 운명에 관한 해설도 비판했다. 위원회는 윤리법 해설이 매우 모호하고, ‘양심 문제에 치우친 해결책’으로 인해 혼배의 불가해제성(不可解除性)을 중요시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했다.


  성 비오 10세께서 단호하게 지적하신 것과 같이, 현대주의자들은 항상 진리와 오류를 뒤섞어서 그리 놀랍지도 않은 그 책 중 나머지 부분이 다 ‘선하고 칭찬할 만하더라도’ 신앙에 특히 위험한 사악한 출판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을 획책하는 자들은 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발 빠르게 움직여서, 여러 언어로 책이 출판되도록 손을 썼다. 이 와중에도 본문은 전혀 바꾸지 않았다. 위원회의 진술문이 내용의 목록에 추가되기도 하고 추가되지 않기도 했다. 순명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그러한 사안에 있어서 불순명하는 자는 누구이며 또 그러한 ‘교리문답’을 탄핵하는 이는 누구일까?


  네덜란드식은 노선(路線)을 정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빠르게 간파했다. 프랑스 교리문답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연결시키지는 않겠지만 잠시 멈추어서 가장 최근의 표현인 피에르 비반드(Pierres Vivantes-살아있는 돌)라는 제목의 ‘가톨릭 신앙에 관한 핵심문서 모음집(Catholic collection of key documents of the Faith)’과 이어 쇄도하는 ‘교리문답 연구(catechetical studies)'를 고찰해야겠다. 그 작업은 그들 모두에서 사용된 ‘교리문답주의’라는 용어를 존중하여 문답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저들은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공부시키는 문답식이라는 형식을 던져버리고 답을 거의 제공하지도 않는다. 피에르 비반드는 성전(聖傳)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새롭고 기이한 입장만을 주장하고 있다.


  신덕도리를 언급하자면, 저들은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특유의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을 유대아교도(유태교인), 프로테스탄트(개신교신자), 불교도, 심지어는 불가지론자 및 무신론자와 같은 차원에 두는 것이다.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이가 여러 강좌에 초빙되고서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종교도 좋다 그러니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또한 아는 게 많은 비신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미덕이라고 한다. 저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면 ‘팀에 소속되는’ 것으로서, 마들레에느 델브렐(Madeleine Delbrel)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는 것을 볼 때, 급우로서 서로 돕고 심지어는 공산주의자와도 협동하여 내일의 사회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피에르 비반드에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대충 설명하고 다른 강좌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본받아야 할 또 다른 ‘성인’이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고, 한편 마르크스(Marx)와 프루돈(Proudhon)에 대해 말하길, 이들이 ‘교회 밖에서 출현한’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수호자’라고 떠들어댄다. 교회가 그런 투쟁을 문제 삼으려 했지만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할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아는 사실이다. 단지, 교회는 ‘불의를 고발하는 것’에서 끝나야했다.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 겨우 이 모양이다.


  그런데 훨씬 더 심각한 것이 있으니, 성경이란 성신의 감도로 쓰여진 것인데도 저들은 그것을 불신한다는 점이다. 발췌된 성경 구절이 세상과 인간의 창조로써 시작하기를 원한다면서 피에르 비반드는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창조하시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가톨릭인들에게는 이렇게 말씀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당황하지도, 헷갈리지도, 진절머리내지도 말아야 한다고 한다.


  창세기로 보기 전에 미리 사무엘 상권을 읽어서 천주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단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작한 것이 전혀 없다. 다음을 읽어보자. “많은 사람들 같이 창조 설화의 작가도 어떻게 세상이 시작되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신자들이 그런 생각을 표현함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호기심을 갖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시를 쓴 것이다....”


 그 후, 솔로몬의 궁전에서, 다른 현자(賢者)들이 악에 관한 문제를 추론하고 나서는 그것을 ‘그림 이야기’로 설명하여 우리가 악마의 유혹 및 아담과 에와의 타락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징벌은 없단다. 이야기는 그 부분에서 끝나고 있다. 교회가 더 이상 징계하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은 성전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만을 벌하지, 그 밖의 사람들은 징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원죄란 ‘날 때부터의 질병’, ‘인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질환’으로서, 매우 애매하고 납득이 안 가는 것이라고 한다.


  종교 전체가 무너졌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만일, 악의 문제에 관하여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강론이나 미사를 드리는 것 또는 고해를 듣는 것이 다 의미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을 들을 사림은 과연 누가 되겠는가?


  성신강림과 함께 신약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을 외친 최초의 공동체를 강조한다. 다음으로 그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 내고’, 우리 주님에 관한 이야기는 끝 부분인 최후의 만찬 이나 갈바리아로부터 시작하여 희미한 기억이 조금씩 벗겨진다. 그 후, 공생애가 등장하고 마침내는 ‘최초의 제자들이 예수의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라는 모호한 서두(書頭)로써 유년기를 등장시킨다.


  이러한 (거슬러 올라가는)기조를 바탕으로 강좌들은 큰 어려움 없이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밝히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리스도의 생애는)선조들이 자기 방식으로 위인전을 기록하면서 지어낸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과 같은 경건한 전설인 셈이다. 또한 피에르 비반드는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최근의 복음을 제공하면서 종도 및 그 후계자들을 묘사하기를 ‘그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예수의 생애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야 하는 데도 이에 앞서 강론하고 신비를 거행하고 가르친다며 비난한다. 사실이 뒤바뀐 것이 아닌가? (그가 말하는 것은) 계시가 종도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의 근거가 되는 게 아니라 종도 개인의 경험이 계시의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


  ‘사말(四末)(일러두기: 사람은 누구든지 한 번은 죽고, 심판을 받아야 하고, 천국에나 지옥간다는 뜻으로서 죽음, 심판, 천국과 지옥 네 가지 말단)에 이르면 피에르 비반드는 혼란을 넘어 동요(動搖)시키기까지 한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답: “달리려면 호흡이 필요하고, 사람이 죽으면 ‘그가 마지막 숨을 쉬었다’고 한다. 숨이란 생명, 개인의 본질적인 생명이며 그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다른 단원을 보게 되면 박동하고 사랑하는 심장에 영혼을 비유한다. 또한 심장은 양심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죽음은 무엇인가? 저자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어떤 이에게는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죽은 후에 살지도 모르지만 확실히는 모른다고 한다. 마지막 부류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도 있다.” 선택은 어린이에게 달려 있다. 죽음은 의견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리문답을 배우는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고 그 영혼이 불멸함을 안다”고 확언하지 않고 제3자 안에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는가?


  천국도 모호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 영원토록 하느님과 함께 지내는 완전한 즐거움을 묘사하려고 천국이란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것이 천국이고 하느님의 왕국이며 영원한 생명이고 태평성세다.” 뜬구름 잡듯 매우 가설적인 해설이다. 그리스도인이 이용하는 위안이 될 것같은 은유, 이야기 속의 인물을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해 주셨으며, 성 교회는 한결같이 ‘천신들 및 뽑힌 이들이 천주를 직접 뵙고 영원히 소유하는 완전한 복락의 장소’로 천국을 묘사해 왔었다. 앞에서 말한 교리문답은 기존의 교리문답이 굳이 지키고 있던 것을 던져버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결과적으로, 배워 익힌 진리에 대한 확신이 결핍됨과 동시에 영적인 무장이 이완될 뿐이다. 죽은 후에 무엇이 그리스도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면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좁은 길을 따라가는 선행(善行)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여하간 가톨릭인이라고 한다면 천주님, 세속 또는 사말(四末)에 관하여 자신의 개념을 정리할 수 있게 제안 해보라는 사제나 주교에게는 가지 말아야 한다. 그와 반대로, 믿어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사제나 주교에게 묻는 입장이 돼야 한다. 사제나 주교가 그 물음에 그냥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입장과 모형을 제시하여 답해 준다면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개인 종교를 짜 맞춘 것에 불과한 것이니, 그런 사제는 개신교인이다. 그런 식의 교리문답이 아이들을 어린 개신교인으로 만들고 있다.


  변혁의 열쇠란 확고한 신념에 역행되도록 몰아가는 것이다. 확신에 찬 가톨릭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욕심쟁이나 이기주의자라도 되는 듯, 보물을 놓지 않으려는 수전노 누명을 뒤집어쓴다. 반대 의견에도 마음을 열고 다양성을 인정해야하고 프리메이슨, 마르크스주의자, 회교도, 심지어는 정령 숭배자의 생각까지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오류가 있는 대화에 잘 어울리는 것이 거룩한 생활의 표시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모든 것이 허용되고 만다. 얼마 전에 혼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義)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정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드리는 경우 조만간 당하게 될 결과이다. 점점 날이 갈수록 도덕률이 폭넓게 이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그러한 결과들은 금방 나타난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교리문답이 그러한 과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2년 리용(Lyons)에서 교사를 대상으로 감수하고 배서하여 발행한, 이른바 ‘교리문답 교재’라는 것에 나온 예를 살펴보자. 제목은 ‘인간을 보라’이다. 윤리를 취급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것이나, 성(性)적인 것이나 또는 무엇을 원하건 간에 후손들에게 윤리 체계를 남겨 줄 의향은 없으셨다. 당신의 영원한 주장은 오로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니, 어떤 경우든지 동료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을 표현하려면 무엇이 최상의 방법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정할 일이다.”


  ‘정결’에 대한 부분은 일반 원칙에서 결론을 끄집어낸다. 복식(服飾)이란 ‘사회 계급이나 존엄성의 표시로’ 또 ‘몸을 가리는 목적’을 보완하기 위해, 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면서, 창세기를 도용한 설명이 있더니 다음과 같이 정결을 묘사한다. “정결함은 질서 정연한 것이고 본성에 충실한 것이다...... 정결하다는 것은 인류 및 땅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저항이나 폭력을 쓰지 않고 자연의 위대한 힘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에 응답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정결이 그리스도인의 정결과 양립하는가?.... 양립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간 및 그리스도인의 정결에 필수적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오래 동안 추구한 결과에 해당되는 발견과 학습 그 어느 것도 부인(否認)하거나 거부(拒否)하지 않으셨다. 그와 반대로, 특별히 무얼 주시려고 오셨다. ‘나는 폐하려 오지 아니하고 오직 완전케 하려 왔노라’.”


  저자는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를 거론하며 자기주장을 지지한다. “그 모임에서 정결한 자는 그녀였으니, 몹시 사랑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런 식으로 복음을 왜곡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하여 말하면서도, 죄가 되는 방탕한 생활은 뒤로 미룬다. 우리 주께서 그녀에게 베풀어주신 용서가 과거를 인정해 주신 것으로 둔갑하여 “가서 더 이상 범죄치 말라”고 하신 교훈에서는 아무런 교훈도 언급하지 않으니, 이전에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여생을 주님께 충성하면서 갈바리아까지 함께 가게끔 해준 확실한 해결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극히 혐오스러운 이 책은 도무지 그 한계를 모른다. 저자는 “쾌락 때문인 것을 아는 경우와 혹은 어떤 여자인지 알기 위해 그 여자와 성(性)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답하길, “진정한 남자 그리스도인, 사랑하고 있는 남자에 관해서는 정결의 법에 관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토론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구속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멍에를 입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법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내 멍에는 달고 내 짐은 가볍나니’라고 하셨다”라고 답한다. 가장 거룩한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영혼을 타락케 하는 모습을 보라!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e)의 말씀에서 저들이 기억한 것이라곤 오로지 한 구절이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로 행하라!”


  캐나다에서 발행된 말도 안 되는 책 몇 권이 나에게 배부되어 있다. 그들은 성(性)에 관하여 하나만을 그리고 항상 대문자로(강조한다는 의미) 말한다. ‘신앙 안에서의 성욕’, ‘성의 장려’, 기타 등등. 그러한 묘사들은 절대적으로 전부 구역질나는 것들이다. 저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녀가 성을 소망하고 성의 포로가 되어 인생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성 가정(聖 家庭)의 많은 부모들이 저항했지만, 그것에 대하여 착한 동기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리 찾아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 뒷장을 보면 교리문답 위원회가 그 같은 교리문답을 인가했음을 알 수 있다. 퀘벡(Quebec)의 종교교육을 위한 주교위원회 의장이 인쇄 허가를 내준 것이다!


  캐나다 주교단이 인가한 교리문답 중 또 하나는 어린이들에게 모든 것을 깨뜨리라고 하는데....그렇게 해야만 온갖 구속으로 말미암아 묵살되어 버린 각자의 개성을 재발견함으로써 사회에서나 가족에서 비롯된 강박 관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한다! 언제나 저들은 합리화에 이용할 만한 복음을 찾아내어, 주님이 그와 비슷하게 깨뜨림으로써 당신 자신이 천주 성자이심을 계시하셨다는 식으로 조언한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그렇게 행하는 것이 주님의 소망이라고 가르친다.


  주교권이 보호받는다는 것을 핑계로 가톨릭교에 반하는 이따위 관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파괴와 연결된 것을 말하지 말아야 되며 우리의 생활을 완전하게 만드는 유대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천주님에 대한 사랑이 천주와 결합하는 것과 당신 및 당신 계명에 순명하는 것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부모와의 유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한 구속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이제 어린이들에게 속박하고 억압해서 개성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이로부터 반드시 해방되어야 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안 된다. 이렇게 자녀들이 파괴되게 놔두는 것은 안 된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교리문답에는 절대로 자녀를 보내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