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르페브르

Home > 마르셀 르페브르 > 라이브러리

제목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05. 그대들은 공룡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7-20

 


르페브르 대주교의 공개서한
5.그대들은 공룡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5. "You're a Dinosaur!"



  (교회 내에서)급진적인 변화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는 가톨릭인들 편에서 생각해보면 현재 부딪히고 있는 (또 모든 혁신에서 공통적으로) 마구잡이식 변동에 저항하여 그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여러분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변화는 생활의 일부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는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과 같다. 50년 전에 좋았던 것이 현대의 물결 또는 현대생활 방식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여러분은 과거에 얽혀서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빈정거림에 대해 대항할 만한 논리를 찾지 못하고 그냥 변혁에 항복해 버리고 만다. 저들은 우리를 “그대들은 반동적인 보수주의자, 공룡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현시대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한다.


 오타비아니(Ottaviani) 추기경은 주교들에 대해 이르기를 “저들은 과거를 되새겨보기를 두려워한다”라고 한 적이 있다. 적어도 우리는 성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개선에 가까운 변화는 거부하지 않았다. 전례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중 몇 가지를 목격하였다. 내가 태어난 지(1905년) 얼마 되지 않아서 교황 성 비오 10세께서 교회내의 몇 가지를 개선했는데, 미사경본의 내용을 시기별로 순환시켰고,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어린이의 연령을 낮추었으며, 쓰이지 않던 전례용 성가(聖歌)를 복구시켰다.


  비오 12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생활 특유의 어려움을 반영하여 공심재(空心齋) 시간을 단축시켰다. 또한 그 분은 아침 미사와 저녁 미사를 허가하였고, 성 토요일 저녁에 빠스카 전야의 예식을 드리도록 배치했으며, 성 주간 예절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공의회가 있기 전, 교황 요한 23세는 소위 성 비오 5세의 예식이라고 하는 것에 자기 생각한 바를 첨가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있었다하더라도, 그중 어느 것도, 어디 한 군데도 미사를 대상으로 새로운 개념을 (폭발적으로)도입한 1969년에 발생했던 정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또 라틴어 사용과 마찬가지처럼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외적인 형식에만 매달린다는 이유로서 우리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들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마치 16세기 혹은 19세기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듯, 라틴어가 이제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죽은 언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라틴어 하나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여 그토록 오랜 시간을 질질 끌어왔다는 점에서 보면 (라틴어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교회 편에서 주의를 기우리지 못한 점이 그토록 컸다는 것인가! 라틴어를 성 교회가 사용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한편 가톨릭인들이 성경 구절을 더 많이 이해해서 영신적인 자양분을 얻어내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자기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활동에 더욱 긴밀하게 연결하고자 하는 심정은 조금 이해가 되는 바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전반에 걸쳐 미사성제 자국어를 도입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개선책 보자면 파리의 성 니콜라 두 샤르도네(St. Nicholas du Chardonnet) 성당과 내가 설립한 성 비오 10세회의 소수도원에서는 서간경과 복음을 자국어로 낭송하고 있다.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기도의 최종 목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영혼을 기도 상태, 즉 천주님과의 일치되는 상태에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더더욱 아니기에 그대로 자국어를 도입해 더 나아가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아진다. 말뜻에만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그 말이라는 것이 장애물이 되는 법이다.


 특히나 지적인 측면은 적으면서, 임의성이 더 강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종교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듣는 때인 요즘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모르다니 놀랍기도 하다. 전례 행위의 전반적인 환경과 아름답고 천상적인 음악도 천주님과 일치할 수 있으니, 전례 행위의 전반적인 환경이란 장소의 거룩함과 종교적인 느낌, 그 건축물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열성, 거행자의 위엄과 신심, 상징적인 장식과 또는 향냄새 등을 말한다. 영혼이 들어 올라가기만 한다면 감동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 증명하려면 거룩하고도 근사한 분위기에서 (천주님을)경배하고 있는 베네딕또회(Beneditine)의 수도원에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더욱 온전한 참례와 기도 그리고 성가를 더 잘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자국어를 도입하고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교회 언어인 라틴어를 아예 쓰지도 못하게 함으로써 아주 간단하게 목표에 도달하려 하니, 이는 실책을 범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미사에 관하여 성공 사례를 볼 필요가 있으니, 새 미사(Novus Ordo)양식일지라도 Credo라든지, Santus라든지,  Agnus Dei때 부르는 성가만큼은 라틴어를 지켜왔다.


 라틴어는 보편 언어다. 따라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전례는 우리를 공번되게, 즉 가톨릭 공동체가 되게 한다. 그와는 반대로 전례를 지역화(토착화)및 개별화하면 영혼을 강렬하게 감동시킬 수 있는 전례의 속성이 결여(缺如)된다.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오랜 기간 전례 행위를 자국어로 표현해 온 동방교회의 예식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곳에서는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고립되어 겉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 자기의 고향에서 벗어나 널리 흩어지는 경우 미사, 성사 및 갖가지 종류의 예식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별도의 사제가 필요하다. 그들은 자기들을 나머지 가톨릭인들로 부터 본질적으로 구분 짓는 특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이해까지는 이르지 못한다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번역이 가능한 보편 언어(라틴어)를 통해서 이득을 보는 신자들에 비해, 자신들만의 전례 언어(자국어)를 가진 동방 교회 신자들이 과연 신앙생활에 더 열심히 하는 것인지는 장담 못하겠다.


 교회의 바깥 사정을 볼 때, 회교가 터키, 북아프리카,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처럼 매우 이질적이고도 차이가 심한 종족으로 구성된 지역에 퍼져 있으면서도 회교의 결속력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그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보면 의아해 한다. 이는 어디서든지 코란의 단일 언어인 아랍어를 강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회교의 은자(隱者)들이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경전의 글귀를 가르쳐 암송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회교는 그 경전을 나름대로 번역하지 못하게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널리 퍼지고 있다. 요즈음에는 모든 이가 모하메드의 종교를 경탄해 마지않는다. 수많은 프랑스 국민들이 회교도로 개종하고 있고 프랑스에 모스크 사원을 세우려고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표양은 놓치지 말고 주목할 것이 있으니, 기도와 경배 때 사용하는 단일 언어의 권위를 고수하는 것이 그것이다.


 라틴어가 사어(死語)라는 사실은 (신앙)보존하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학적인 변화가 생기기 마련인데, 신앙의 표현을 보존하는 데에는 당연히 사어(死語)가 최상의 수단이다. 의미 발달론에 관한 연구는 지난 10년 동안에 급격히 발전하여 학교에서 프랑스어 강좌에 도입되기까지 했다. 의미 발달론은 언어의 의미 변화, 시간이 경과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의미의 변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매우 짧은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의미의 점진적인 변천을 조사한다. 그러니 그런 지엽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변화하는 화법에 맞추는 경우에는 신앙의 보고(寶庫)를 매도할 위험성이 있지 않겠는가?


 언어의 의미는 계속 변천하고 있고, 서로 다른 나라 심지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조차 각각의 언어를 이용하여 의사를 표현했을 경우, 과연 무형(無形)의 영원한 진리를 이천 년 동안이나 무너뜨리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을까? 살아있는 언어는 변화하고 또 바뀐다. 아무 때나 살아있는 언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전례용 언어로 삼으려 한다면, 계속해서 의미 발달론적인 필요에 따라 거기에 맞는 언어를 채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끊임없이 알맞은 언어를 채택하기 위한 위원회 설립이 있어야 하고, 그 때문에 사제가 미사 드릴 시간을 더 이상 확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안 된다.


 1976년 카스텔간돌포(Castelgandolfo)에서 교황 바오로 6세를 만났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황 성하, 지금 프랑스에는 공식적으로 드리는 성체성사 기도문이 열 세 가지나 된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교황은 팔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외치길, “저보다 더 많아요, 예하, 저보다 더 많아요!” 이로써 전례학자들에게 라틴어로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했더라도 그렇게 많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그런 신앙 고백문이......여기서, 저기서 혹은 아무데서나 인쇄된 후에.......유포되는데, 예식을 진행하는 동안에 사제가 즉석에서 지어내는 전문(Canon)과 “고해 예식의 준비”로부터 “회중의 파견”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도입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사제가 라틴어로 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여론을 조성한 또 다른 외적인 표시가 있으니, 그것은 캐속(성직자 복)을 착용하는 문제인데 바티칸을 방문할 때나 교회에서 일할 때보다 일상생활에서 더 두드러진다. 캐속 미착용에 의문을 품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문제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언급하기만 하면 그 때마다 성직자 층으로부터 항명의 아우성이 들려온다. 이러한 캐속 미착용에 관련하여 아방가르드(전위파-前衛派) 사제가 기고한 기사를 파리紙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야말로 유치한 짓이다 .......... 프랑스에서는 별도의 제복(制服)을 입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길거리에서는 사제를 알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캐속이나 로마 칼라는 도리어 경계심만을 유발시킨다 ........... 사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물론 성체성사의 회중(會衆)을 주관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살펴본다면 ‘성체성사의 회중(신자들)을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호칭에는 복음과 반대될 뿐만 아니라 확연히 인정된 사회적 관계와도 전적으로 반대되는 관념이 있다. 어떠한 종교에도 지도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표시를 하는 법이다. 현재 대대적으로 유행하여 널리 퍼지고 있는 인류학이 이를 증명해 준다. 회교도에도 복장의 차이가 있으니 칼라와 반지가 그것이다. 불교도인 승려들은 샤프란 색의 로브를 걸치고 머리를 민다. 파리 및 그밖에 다른 대도시의 거리에서 그런 종교에 연관된 젊은이들을 만나 볼 수 있는데, 그들의 외양를 보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직자 옷을 입으면 그가 성직자 또는 종교인임이 드러나게 되고 이처럼 제복은 그가 군인 혹은 경찰관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차이점이 하나 있다. 문화 질서를 나타냄에 있어서 군인과 경찰관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시민의 상태이지만, 사제는 어떤 여건 상태에서든지 구별이 가도록 성직자 옷을 입도록 하는 것이 기대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서품식 때 사제가 받는 거룩한 표시는 그가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의 것이 아님을 뜻한다. 성 요왕에 의한 복음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세속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희를 세속에서 간선(揀選)한고로”(15: 19). 성직자 옷은 특별히 눈에 띄어야 하고 정숙성, 세속에서의 분리 그리고 청빈의 정신을 반영한다.


 둘째로, 사제에게는 주님에 대하여 증언(證言)할 의무가 있다. “너희는 나의 증거자(證據者)라... .......아무라도 등불을 켜 모말 밑에 두지 아니하고.” 동유럽 정부 당국에서 종교가 제의실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선포했지만 종교는 제의실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신앙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으니, 온전하게 깨우쳐 이해할 수 있는 증거로써 저들을 밝혀 주라고 하셨다. 한편 사제에게는 캐속보다는 말을 통한 증거가 더 본질적인데, 그렇다하더라도 캐속(수단)을 입음으로써 저 사람은 분명히 사제직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짐작하게 암시를 주는 까닭에 그 말씀의 증거가 훨씬 돋보이게 된다.


 때로는 정교(政敎)분리가 인정되고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하여 무신론 정신이 모든 활동 영역에 조금씩 스며들고, 이제는 많은 가톨릭인과 심지어는 사제들까지도 문명사회에서 천주교의 위상이 확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러 곳곳에 세속주의가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제는 점점 현(現) 사회에서 자신이 낯선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고 곤혹스럽게 되며 마침내 과거의 상징(사제복장 등)이 되어 사라지고 만다. 사제라는 존재는 거의 겨우 묵인되는 실정이니 적어도 그런 식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가? 세속에서 동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결국 군중 속에서 자아를 잃기 마련이다. 그런 유형의 사제는 자기 나라에 비해서 그리스도교화가 더 잘 유지되고 있는 나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니, 특히 자신의 사제직에 비중을 두는 감각(무게중심)을 잡는 감각이 부족하다.


 시대의 종교성이 어떠한가? 이를 단정하기란 어렵다. 사업 관계나 비공식적인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이 무조건 비종교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에콘(Ecne) 출신의 젊은 사제와 정체불명의 반짝 유행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를 증명한다. 캐속을 입는 것이 장애물이라니? 아니다! 사람들은 매우 순수하게 길에서 역에서 멈추고서는 사제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자기들이 사제를 보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다고 말한다. 새 교회는 대화를 자랑하지만 사제가 대화 나눌 상대방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대화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감시자가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사제의 캐속을 금지하는 것이니 이는 종교를 말살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부가 된다. 반대로, 캐속을 부활시키면 종교가 되살아난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겉모습으로써 자기 신분을 드러내는 사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강론이다. 대도시에서 눈에 띄게 구별되는 사제가 없다는 것은 복음 전파가 심각하게 퇴보 중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악독한 대혁명의 작용과 정교(政敎)분리 원칙의 연장선상에 있다.


 캐속을 입음으로써 사제가 곤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도 첨언해야하니, 캐속(수단)을 입은 사제를 보면 신자들이 그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며 또한 사제 자신이 지상에서 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때때로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유혹으로부터도 보호해 주는 셈이다. 캐속을 입은 사제에게는 신분의 위기감이라는 것이 없다. 신자들 편에서 볼 것 같으면, 그들은 자기들이 대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게 되고 캐속은 사제직의 권위를 보증해 준다.


 어떤 가톨릭신자들이 신사복을 입은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갈 때 느끼는 어려움을 말해준 적이 있는데, 사죄권에 관한 한, 평범한 신분에 불과하고 아무런 권한도 없는 사람에게 자기 양심의 비밀을 털어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고해성사는 재판과 같은 행위인즉, 민법에서조차 판사복인 로브를 입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으니, 하물며 신성한 고해성사에서는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