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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상의 비오 신부님과 교회 그리고 르페브르 대주교 (7)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1-19

 



오상의 비오 신부님과 교회 그리고 르페브르 대주교 (7)

 

비오(Padre Pio) 신부님은 모든 종류의 고통 (악마로부터, 그분의 오상으로부터)을 경험했지만, 가장 상처를 주는 것은 그분이 교회 당국으로부터 받은 고통이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Patre Pio) 신부님은 만프레도니아(Manfredonia) 의 주교와 같은 고위성직들이나 일반사제들의 질투뿐만 아니라 바티칸에서 오는 엄격성에 직면해야했습니다. 이미 1922년 6월에, 사람들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분의 매일 미사는 매일 다른 시간에 사전 통보 없이 이루어져서 신자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분은 편지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비오(Padre Pio) 신부님의 성흔(오상)과 행동에 관한 초자연성을 부인한 다양한 성명서가 교황청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 1931년 6월 9일, 오상의 비오(Padre Pio) 신부님은 같은 교황청에 의해서 미사 제헌만을 빼고는 모든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933년 초 교황 비오 11세는 “내가 빠드레 비오(Padre Pio) 신부님에게 잘못된 처분을 내리지 않았지만, "제가 잘못된 정보를 받았습니다." 라고 말씀하면서 (교황은) 비오(Padre Pio) 신부님의 공개적인 미사 제헌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셨습니다.  

 

오상의 비오(Padre Pio) 신부님의 성무는 점진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첫째, 남성들의 고해성사가 허용되었고(1934년 3월 25일), 그리고 나서 여성(1934년 5월 12일)들의 고해성사가 허용되었습니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교황은 신자들에게 오상의 비오 신부를 방문하도록 격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박해가 요한 23세 교황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비오 신부님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나 많은 바오로 6세와 더불어 박해가 중지되어서 전통적인 라틴어 미사를 끝까지 그분께서 제헌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68년, 선종 몇 달 전에,  비오(Padre Pio) 신부님은 다가오는 성신회 총회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러 온 르페브르(Lefebvre) 대주교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교회를 섬기는 이들 두 사람의 위대한 종들의 만남은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분이 교회당국으로부터 받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상의 비오(Padre Pio) 신부님은 결코 그들에 대해서 어떤 괴로움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천주님의 섭리를 신뢰했으며 앞으로 다가오는 더 좋은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7. Padre Pio, the Church and Archbishop

 

Padre Pio experienced all kinds of suffering (from the devil, from his wounds…) but what hurt him most were the pains he received from the authorities of the Church.

Padre Pio had to face not only the jealousy of priests or prelates, like the bishop of Manfredonia, but also the severity of the Vatican. Already in June 1922, restrictions were placed on people’s access to him. His daily Mass had to be said at different times every day without prior notice to prevent the faithful from attending it. He was forbidden to write any letter.

From 1924 – 1931 various statements were made by the Holy See that denied the supernaturality of Padre Pio’s stigmata and actions. On 9 June 1931, Padre Pio was ordered by the same Holy See to desist from all activities except the celebration of the Mass, which was to be in private. By early 1933 though, Pope Pius XI reverted the ban on Padre Pio’s public celebration of Mass, saying, “I have not been badly disposed toward Padre Pio, but I have been badly informed.”

Padre Pio’s faculties were progressively restored. First, the confessions of men were allowed (25 March 1934) and then women (12 May 1934). In 1939 when Pope Pius XII was elected pope, he began to encourage people to visit Padre Pio. More and more people began to make pilgrimages.

 

A new period of persecution started under the Pontificate of John XXIII, but they ceased with Paul VI who had great respect for Padre Pio, so much so that he allowed him to say the Traditional Latin Mass to the end.

In 1968, a few months before his death, Padre Pio received the visit of Archbishop Lefebvre who came to request prayers for the forthcoming general chapter of the Holy Ghost Fathers. Though short, the meeting of these two great servitors of the Church is worth mentioning.

Despite the persecution he received from the authorities of the Church, Padre Pio never showed any bitterness towards them but trusted in Divine Providence and waited patiently for better days to c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