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성비오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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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가 결합된 기쁨:기쁨으로 변화된 십자가 (2016. 4.10 , 펠레 주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4-29





프랑스 푸이(Notre-Dame du Puy-en-Velay)로 가는 순례길 동안 성비오10세회 총장 베르나르 펠레 주교는 2016년 4월 10일 주일, 가정에 관한 후기 시노드 권고(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에 대하여 강론했으며 이 강론은 일정보다 이틀 빠른 4월8일에 간행되었고 4월 1일에 있었던 교황방문에 대한 내용도 들어있다.


십자가가 결합된 기쁨: 기쁨으로 변화된 십자가

Joys Mixed with Crosses; the Cross Transformed into Joy  


선한 목자 주일인 오늘, 우리는 장엄한 성모영보첨례 축일을 맞이하는 특권을 누립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모영보축일 – 주요 축일입니다 - 이 성주간과 겹칠 때, 이 축일은 부활 후 팔부 첨례 이후로 늦추어집니다. 부활 주일 이후 첫 번째 월요일에 거행됩니다. 따라서 오는 일요일에 장엄미사로서 이 축일을 거행할 권리가 있습니다.


영보고지의 기쁨과 수난의 통고


특히 대 보속의 희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이 성모영보첨례축일을 거행하는데, 매번 영보첨례가 있는 희년은 통상적으로 3월 25일 거행되고 공교롭게도 성 금요일과 겹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매번 해를 거듭할 때 일어납니다. 영보첨례와 겹치는 성 금요일은 우리 주님의 성 육신 축일입니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리며, 성모님이 천주님의 계획을 받아드리고 믿음을 선언했을 때의 그 순간에, 이에 걸맞게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직접 지향을 하게 됩니다. 천주님의 구속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그 계획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계획이니, 그 계획은 성모님의 승낙에 달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 동의에 달려있고, 동정녀께서 동의하셨던 그 순간에 천주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영보고지(領報告知)’를 말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 육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보고지는 인간으로서 우리 주님의 생애 시작입니다.


금년 영보고지첨례 이 날은 주님의 죽음,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기념하는 그 날과 연결되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날과 결합된 영보고지는 우리 주님의 시작과 끝이며, 그리스어로 시작과 끝인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며 푸이(Puy) 이곳에서 대 보속의 희년을 요청하고자합니다. 이 축일과 또는 희년은 또한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매우 밀접하게 결합이 되는 데, 한편으로는 동정 마리아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주님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보고지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수난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두 분이 함께 결합되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끔찍한 수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바로 그 시간에, 성모님 역시 십자가 아래에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성 교회는 성모님의 고통은 순교(殉敎)와 동등한 고통이라고 감히 말합니다. 영보고지에는 기쁨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수난에는 고통, 슬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의 어우러진 기쁨


성 요셉에 관해 말하자면, 그분의 축일에, 만과(晩課)의 찬미가에서, 그분의 기쁨과 눈물을 결합하는 마무리 노래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눈물이 어우러진 기쁨 miscens gaudia fletibus. 그분은 기쁨과 눈물을 섞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면, 영보고지와 예수 수난에서 보는 바처럼, 이 세상은 기쁨과 눈물이 많은 곳이며, 이는 멀리 확대되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영보고지에서 우리는 기쁨을 보고 즐거워하니 이는 정상적이며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특별한 점은 바로 천주께서는 천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되시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소멸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된 그 단어는 엑시나티비트 exinanivit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비웁니다(필립피2:7) 천주님에게 있어서 사람이 되심은 – 천주님은 전능하시고, 특히 모든 것을 조성하셨습니다. - 인간의 본질이 비워짐을 의미하며, 그와 동시에 주님의 무한하신 위엄, 그분의 전능하심을 전혀 빼앗지 못함을 뜻합니다. 천주님은 천주님으로 남아 계십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어린 아기 예수란 전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그분의 생명이 피조물에 달려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전능하신 천주님으로 계신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우리의 구속자께서 도래(到來)하심을 보는 이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 안에는 이 구속자께서 소멸 안에서 성취되어야 할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이 여행은 영보고지에서 시작되어 예수 수난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여지껏 듣지 못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안에서, 주님의 영혼이 최고조에 이른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는 행복의 정점인 지복직관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이러한 기쁨과 이러한 눈물이 어떻게 일치되는지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흔히 눈물의 계곡이라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럼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이 눈물의 계곡입니다. 이 세상에는 기쁨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서, 우리가 동정녀께로 다가가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중재자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보여드릴 눈물과 청원과 탄원이 있으며, 그리하여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온갖 좋은 모든 선물과 은총을 얻게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눈물을 가져옴으로써 그 눈물이 기쁨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수단


이러한 눈물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천주님은 무한히 선하십니다. 그분은 선 그 자체이십니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서는 모성적인 선을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가요? 그리고 우리가 노력을 할 때조차 시련이 우리를 참으로 어렵게 합니다. 우리가 선하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려고 노력할 때에도 시련이 있습니다. 왜 이러한 시련들이 있나요?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방법을 택하시나요? 그렇지 않아도 구원하실 수 있는데~


아기 예수의 미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족된 그분의 어린 눈물이 증폭되고 무한히 확대된 눈물을 우리는 압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한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 주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무한한 구속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까? 왜 이러한 고통이 있습니까? 천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자비의 일을 행하십니다. 인류를 내려치는 커다란 악은, 우리의 역사와 생애를 병들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죄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주님께서는 고통, 슬픔 그리고 시련을 허락하시는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좀 더 이해하고자 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모든 고통, 우리가 겪어야할 모든 고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겪는 고통은 아무리 작은 고통일지라도 심지어 어린 아이 조차도 겪으며, 또는 전쟁이나 기근 같은 큰 고통도 겪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죄를 통하여, 고통과 사망이 인류의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죄 이전에는 고통이나 사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죄면 질수록, 고통이 더 있게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그런 방법을 좋아하시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좋으신 주님은 고통을 유발하게 하여 즐거움을 취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 얼마나 자비를 베푸시는지를 알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이 고통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자비의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이러한 고통을 주시고 심지어 죽음까지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 되도록, 우리가 그 고통과 사망을 받아드릴 정도까지, 고통과 죽음을 일치시켜 주님께로,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가까이 다가도록 하십니다. 분명히 어려운 기쁨이지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영혼의 심연(深淵)에서, 우리는 천주님의 기쁨 안에서, 심지어 우리가 죽을 때조차 우리는 기쁨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좋으신 주님께로 다다가면, 일단 우리가 선하신 주님과 우리의 영혼을 일치시키려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에서 달아나면, 예, 그러면 천주님의 이러한 사랑, 이 기쁨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있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영혼 안에서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다. 은총 상태의 영혼 안에서 우리 주님은 그분의 고통으로 인하여 당신의 수난을 지속하십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아십니다:“나 지금 너희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심의 결함(缺陷)된 바를 저의 몸이신 교회를 위하여 내 몸으로써 보충하노라.”(콜로새1:24) 그러면 여러분의 고통은 여러분과 타인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첫 번째 분이십니다. 너무나 좋으시고 너무나 권능이 크기에 악을 선으로 변환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악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을 죽인 죄는, 그분으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고, 우리 주님은 이러한 행동을 하시어 이것을 구속 사업으로 바꾸시며, 그곳에서 주님은 천주께 자신을 제헌하심으로써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배상하시고, 그리하여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만약 저들이 하고자 하면 주님은 구원을 주시지만,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질 않습니다.


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

(Amoris Laetitia는 성 요셉을 찬미하는 노래로서, ‘눈물이 어우러진 기쁨’이라는 뜻)


눈물과 결합된 기쁨. 최근 사건, 가장 최근의 일,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종도적 권고, 우리를 울게 만드는데 이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권고는 혼인에 관한 두 개의 시노드의 요약입니다. 매우 길며 옳고 아름다운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제가 잘 지어진 빌딩, 아름다운 배라고 부르려고 명명한 후에, 교황께서는 배의 표면을, 배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냈으니, 여러분 모두는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십니다. 그 구멍이 모든 가능성이 있는 경계(警戒)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무슨 차이가 있겠으며, 그 구멍이 아주 작은 거리라는 데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나요? (결국) 배가 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티끌만치도 변치 않음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폐하기 전에)교법에서 한 점이나 한 획도 폐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다 이루리니”(마테오5:17-20) 천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은 예외가 없습니다. 천주께서 계명을 주실 때, 천주님은 모든 사례를 내다보시는 무한하신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천주님의 계명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저들은 혼인에 관한 이 계명이, 혼인은 불가해소성이다 라고 지지하는 – 저들은 이런 말을 가지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 척하면서, 그 후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이라 부르는....저 말에는 죄 속에 사는 저들도 은총 상태에 있다하면서 그러므로 저들도 영성체를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흘리면서 예외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들이 행해진 말의 중대성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구석에다가 아주 조그마한 예외 조항을 만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요? (조그마한 예외 조항을 만든 것이 오늘날) 저들은 손으로 하는 영성체를 도입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렸듯이, 배에 조그만 구멍이 나면 그걸로 충분한 겁니다. 그건 배가 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


Miscens gaudia fletibus. 아직도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눈물이, 최근에도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 우리가 교황과의 만남이 있었음을 압니다. 교황께서는 베네딕토16세 교황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하셨습니다. 교황직 끝마무리 당시에 베네딕토 16세는 시한(時限)을 설정해놓고 그 날까지 성비오10세회가 로마의 제안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파문될 것이라고 결정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이르시길, 베네딕토16세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은 아마도 성령이신 것 같다면서 그분이 사임하기 몇 칠전 그러한 파문계획을 포기했다고 말씀했답니다. 왜냐하면 베네딕토16세께서 이르시길, “나는 이 문제를 나의 계승자에게 일임한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그분의 계승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파문 문제를 책상에 놓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여기에 날짜와 서명을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아니오, 나는 저들을 파문하지 않을 것이며, 견책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계속하시길, “나는 그대들을 견책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은 가톨릭인들이다.” 또 계속 말씀하시길, “그대들은 완전한 교류로 가는 길 위에 있다.”하셨으면서도 우리가 가톨릭인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또한 말씀하시길, “그대들과는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소. 내가 그대들에게 잘해주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렵다고 하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오. 들으시오. 나는 동방교회의 수장 키릴(Kirill)을 포용할 것이며, 영국 성공회에게도 잘해줄 것이고, 개신교인들에게도 잘해주는데, 왜 내가 가톨릭인인 성비오10세회에게 못해 줄게 있겠소?” 이것이 교황께서 설명하신 겁니다. 교황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문제가 있다한다면 그대에게도 역시 문제가 있소. 그러므로 우리가 밀어붙이지 말아야 되고, 더 이상 분열되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시간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교황께서는 고해(告解)들을 권리, 그리고 꽤 분명하게 이후(성년 이후)에도 계속하여 종부성사도 줄 수 있고 또한 낙태에 관한 사면권 부여 등...여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러면 다른 성사도 안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교황께서는 그 생각에 대해 아부 개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나아갈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어느 날 우리는 작은 희망을 주는 일들을 보게 되고 그것에 기뻐할 것이며 그 다음 날 성 교회에 너무나 많은 해악을 끼친 끔찍한 권고가 있습니다. (역자 주: 로마는 이르기를, SSPX는 바티칸 공의회와 새미사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 반면에 the Amoris Laetitia는 안 좋은 문서이므로 따라서 기쁨과 눈물이 서로 엉킨 것이다)


포조 대주교(Abp. Pozzo)와의 인터뷰


다음날, 우리를 다루는 로마에 있는 법정인 에클레시아 데이 위원회의 위원장이신 포조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포조 대주교는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생각건대”.....- 신앙교리성성 위원회, 그리고 단지 그.....- “우리는 그대들에게 다만 요구되는 것, 가톨릭인에게 요구되는 것만을 요구하고자 합니다. 그 외는 없어요..”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기 생각을 펼쳐 나갔습니다:“2차 바티칸 공의회의 대부분은 교리적인 것은 없고 그러므로 그건 그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오.” 대주교께서 심지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훨씬 분명해졌습니다: “그대들은 노스트라 아에타테(Nostra Aetate)에서 선언된 것과 같은 종교의 자유, 에큐메니즘, 타 종교와의 관계에 관한 그대들의 견해를 옹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랄만한 것이어서 제가 대주교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원장께서 저희 집으로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잘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가톨릭 신자 여러분, 이걸 가지고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가 심오한 변화, 중대한 변화라고 실제 생각하는 바입니다. 교회의 무시무시한 변화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것은 교회를 감싸 쥐고 있는 혼돈의 결과 일부라고 말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엄청난 혼돈, 최종적으로 모든 방면에서 신앙과 도덕을 거스르는 심각한 공격이 있으며, 마치 이것이 신앙교리성성에서 결정한 것처럼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교회에서 항상 가르친 것을 오직 말하고 가르치는 이들을 다룰 권한이 없다....아주 심각한 죄로서 생각하여 저들이 행하는 것을 우리는 고려할 권리가 없고, 반면에 저들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 터무니없는 말뿐만 아니라 죄의 공개된 길로 가는 이단을 서슴치 않고 말하는 고위 성직자, 추기경들이 - 너무 많다. 우리는 거의 항상 교황께 말씀 드린다.


그래도 교회 안에는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하면서 (잘못된 것에)반응하고 생각하며 말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질서와 눈물 가운데 속삭이는 말이 있습니다:아니오. 우리가 그대들에게 공의회를 받아드리라고 강요할 수 없어요.


그들은 아마도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하고, 천주께서 우리를 비추시어 의미하는 것 이 모두를 우리가 깨달도록 해야 하며, 그리고 진정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일이라도 다른 각도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항상 가르쳐왔던 모든 것에 대해 충성으로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확고하고 단호한 자세로 남아야 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이를 부인(否認)합니다. 현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가톨릭인이요, 가톨릭인으로 남길 원합니다.


성모여, 우리가 가톨릭신앙에 충직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곳 푸이(Puy)에서 오늘 동정녀 마리아께 먼저 요청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이 모든 보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과, 우리가 순수하고 소박한 가톨릭인으로 남아 우리의 일을 지속하며, 이 가톨릭신앙을 다시 퍼뜨리고, 그리하여 조끔씩 영혼을 구령하고, 그 영혼이 구령되어 우리 주님께로 되돌아오고, 신앙으로 돌아오며, 그분의 계명, 천주님의 계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주일인 오늘, 젊은이들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러분 각각 모두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수도자와 사제의 생활로 나를 부르시는 분은 좋으신 주님이신가? 주님은 내가 사제되길 원하시는가? 주님은 내가 포도밭에서 일하여 싸워서 영혼을 구령하길 원하시는가? 이것이 단지 하나의 생각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가? 심지어 포조(Pozzo) 대주교는 우리에게 이르기를:“그대들은 조만간 이태리에서 신학교 세울 것에 대해 생각해야겠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교회당국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온갖 이론이 난무(亂舞)하는 이러한 무질서 가운데,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전반적인 혼란 가운데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은 멈출 표징조차 안 보이고 심지어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가호(加護)가 필요한가요! 그리고 이 보호하심이 충성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과거에 교회가 행하고 가르친 것이 갑자기 거짓이 되어버렸습니다. 완전 반대입니다! 이는 진실입니다. 진실은 진실로 남고, 그리고 이 진실을 고수(固守)하는 자들은 오류와 변혁으로부터 보호됩니다.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고 울어야 합니다. 시작되는 시련이 교회의 시련이 아니고, 이러한 눈물을 통하여 천주님이야말로 온 권능이시고, 그분이 천주섭리이시며,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성모님에게로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도록 합시다. 역사를 쓰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그분이십니다! 자유인 인간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결언(結言)을 내리는 이는 천주이십니다. 천주님을 찾는 이들을 버리지 않는 분은 천주이십니다. 왜냐하면 천주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은 이 도움을 받을 것이며, 심지어 “천주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저 만사를 선으로 유도하심을 우리가 아느니,”(로마8:28) 모든 것, 심지어 시련조차, 교회 내의 이 위기조차 “천주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저 만사를 선으로 유도하심을 우리가 아느니, ”천국으로 틀림없이 이끄는 이 사랑, 신덕, 망덕 애덕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요청합시다.


이 강론의 특성을 보존하기 위해 구어체 스타일로 꾸며졌습니다.

순례사진보기 France: 4,000 pilgrims in Puy-en-Velay (9 and 10 April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