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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반복되는 아씨지 스캔들(2011 - 09 - 1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4-08



반복되는 아씨지 스캔들(Erare humanum est, perseverare diabolicum)


르지 드 칵케(Regis de Cacqueray) 신부(프랑스 관구장)의 이 문서는 성 비오 10세회 총장이신 베르나르 필레 주교의 승인을 얻어, 9월 12일에 프랑스의 laportelatine.org에 처음으로 탑재되었다. sspx.org에 이 중요한 논평의 번역문을 탑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프랑스 관구에 감사드린다.


 이번 2011년 10월 27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저 좋은 뜻을 가진 선남선녀들끼리의 화기애애한 만남일까?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교회에 관한 이런저런 의견 교환일까? 아니다. 현 교황의 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가 1986년 10월 27일에 저지른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반복하는 것이다.


2011년 10월 27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천주교 신앙으로 개종하라는 외침일까? 교황의 선언문을 보면 이날 무슨 일이 있을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그릇된 종교를 대표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교황은 회고의 날에 모두가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초대된 곳에서 합류하자며 개인적으로 그들을 불렀다.1)


 확실히 제1차 아씨지 모임과 달리, 기도는 열심이지만 조용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그릇된 종교의 대표자들은 도대체 어떤 신에게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있을까? 교황이 노골적으로 ‘나름의 종교에 따른 신앙’으로 더 깊이 생활하도록 그들을 초대한 마당에, 그들의 그릇된 신이 아니면, 그들은 어떤 신에게 기도하고 있을까?2) 회교도는 마호메트의 신이 아니면 누구를 향할까? 정령숭배자들은 그들의 우상이 아니면 누구에게 말을 걸까? 교황이 개인 기도의 날에 그릇된 종교의 대표자들더러 공식 자격으로 참가해 달라고 부탁한다는 게 어찌 있을 법한 일이리오? 최고 주교의 그런 행동은 ‘사실상(ipso facto)’ 세상의 모든 이에게 스캔들이 되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천주께 대한 지독한 신성모독이다.


삼위일체인 동시에 강생하신 천주를 욕되게 함

그런 종교 박람회의 성격을 달리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그것은 천주십계 중 제1계,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3)를 심각하게 어기는 것일진대. 어느 누가 자기 선조들에게 충실한 유대인들을 천주께서 흡족히 여기시리라는 생각을 품을 수 있으리오?


그들은 천주성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삼위일체이신 천주를 부인하거늘. 천주께서 알라에게 건네는 기도에 어찌 귀를 기울이실 수 있으리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했거늘. 천주께서 온갖 이단자, 종교 분열자와 당신의 교회를 거부하는 배교자들을 인정하는 것을 어찌 용납하실 수 있으리오?


그들은 천주성자의 진입장벽이 없는 쪽에서 왔거늘. 천주께서 온갖 정령숭배자, 범신론자와 그 밖의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에게 바치는 경배로써 어찌 영광을 누리실 수 있으리오?


 당신의 아들이 그와 반대로 “나로 말미암지 아니고는 아무도 성부께 나오지 못하나니라.”4)라고 말씀해 주셨거늘 천주께서 어찌 그런 기도들을 들으실 수 있으리오?


 이단자 혹은 비신자들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인데 올바른 신앙을 믿는 영혼들은 천주께 기도한다. 천주는 당신께 속한 자들을 알아보실 것이고 그들을 오직 하나인 참된 교회로 이끄실 것이다. 하지만 ‘자기 종교의 신앙’에 따라 그릇된 종교의 대표자 자격으로 기도하라며 그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확실히 그릇된 그들 종교의 정신에 따라 또 그릇된 그들 종교의 방식대로 그들이 초대되고 있는 것임을 신호로 알리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그 모임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께 가해지는 그런 최고의 모욕 행위를 알아볼 수 없으리오? 우리가 어찌 그런 스캔들을 보고 크게 분개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침묵이 어찌 공범 행위가 아닐 수 있으리오?


변질된 그리스도의 평화

몹시 중한 이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에도 어긋난다. 교황은 평화를 위한 기도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교황이 추구하는 평화의 성격은 어떤가? 세상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분쟁을 끝내는 것일까? 거짓 신들을 향한 기도는 우리에게 응징이 아니라 인류의 평화라는 축복을 가져다주리라고 우리가 정말로 믿어야 할까? 노아의 홍수를 잊었는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는가? 그들의 죄는 불신의 죄보다 덜 중했거늘.5)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에 대한 기록이 복음과 역사에서 지워졌는가? 그것은 당신 백성들의 죗값이었거늘.


  게다가 우리가 현세의 평화를 얻는다 한들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육신 죽이는 자들을 무서워 말라. 육신을 죽인 후는 다시 더 해하지 못하느니라...곧 죽인 후에도 또한 지옥으로 보낼 권이 있는 자를 두려워하며, 또 너희게 이르노니, 이런 자를 두려워하라.”6)


 또 다른 점을 보건대, 이 평화를 위한 기도에서 우리가 어찌 틀림없이 부지불식간에 그러면서도 배반으로 향한 방향 전환을 볼 수 없으리오? 그것은 시민의 평화를 위한 박애라는 그럴듯한 대망의 에큐메니칼한 목적 때문이거늘.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 양심의 자유로 봉인된 프리메이슨의 평화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현 교황이 기도하는 평화는 그냥 현세의 평화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종교의 자유,7) 교황들이 그렇게나 여러 번에 걸쳐 단죄한 양심의 자유8)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황이 내건 기도의 지향이다. 또 교황이 기도로 청하는 평화는 양심의 자유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현세의 평화이다.


가증스러운 교회의 굴욕

그러나 죄를 범하라는 그런 초대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이신 천주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이 크게 은결든다면, 그리스도의 흠 없는 배우자, 당신의 오직 하나인 가톨릭교회는 만천하에 욕을 당하는 것이다. 종도들, 교황들, 교회의 교부들, 성인들, 순교자들 그리고 가톨릭 군주들과 영웅들의 가르침이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다윗 성왕의 가르침이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다윗 성왕에 따르면 “이교 백성들의 모든 신들은 헛된 것들이로다.”9) 이단자들에게 인사하지 않는 성 요한의 정연한 질서10)가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6세 혹은 비오 9세11)의 가르침이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그 교황들에게 양심의 자유는 ‘망상’이다. 교황 레오 1312)세와 교황 비오 11세13)가 종교간 회의를 조직한다든지 거기에 참가하는 것을 정식으로 금지한 게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우상에게 제물 바치기를 거부한 폴리에욱토(Polyeuctus)의 순교가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t. Frasncis de Sales)의 표양이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그는 열교(개신교) 이단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논쟁(Controversies)’을 기록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천 명의 전교자들이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푸아티에(Poitiers)에서 회교도를 저지한 샤를르 마텔(Charles Martel)의 영웅과도 같은 행위, 창과 검을 써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간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efroy de Bouillon, 프랑스 귀족 출신의 제1차 십자군 지휘관)의 영웅과도 같은 행위가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신성모독을 벌한 프랑스의 성 루이(St. Louis,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아씨지의 정신에 물든 천주교 신자가 어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신덕도리에 수긍할 수 있으리오? 그런 자가 어찌 가톨릭교회에서 오직 하나인 구원의 방주를 볼 수 있으리오? 한술 더 떠서 세상에나, 이 스캔들은 마치 그런 모임의 무게감이 충분치 않기라도 하다는 듯 최고 성직 권위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자신에게서 온다. 이것은 회의를 주관하는 교황을 천주교회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유엔이라는 ‘교회’의 수장으로 삼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본질을 볼 때 우주 대 건축사의 프리메이슨에 따른 예배와 똑같은, 모든 종교들 중에서 한 종교의 ‘제1인자(primus inter pares)’인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사명을 악마같이 악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엄숙하게 명하시기를, “형제들을 신앙 안에서 굳건하게 하고” 당신의 양떼를 먹이라고 하셨는데, 베드로의 후계자는 사실상 자기 형제들을 종교무차별주의와 상대주의 안에서 굳세게 하려고 한다.


엄청난 스캔들

왜냐하면 교황 개인의 결정은 끔찍한 신성모독을 넘어 천주교인이건 천주교인이 아니건 영혼들 안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킬 것이니 말이다. 온갖 그릇된 종교의 대표자들을 하나로 묶는 교황의 모습 앞에서, 사람들 대다수의 반응은 진리와 종교를 훨씬 더 상대화하는 것이리라. 교황이 양심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라며 그릇된 종교의 대표자들을 초대하는 것을 볼 때, 가톨릭 종교를 거의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개인이 가톨릭이 아닌 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안심하고 싶어지지 않으리오? 천주교회의 우두머리가 종교들의 온갖 신을 모아들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어떤 비 그리스도인이 가톨릭 종교 안에서 다른 모든 종교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인 참된 종교를 보리요? 그는 상대주의에 굴복하지 말라는 교황의 권고를 진리를 고수함이 아닌 성실함을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떻게 해석하리요?(진리를 고수함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교황의 권고를 해석해야 함에도, 성실함을 중히 여기는 방식으로 교황의 권고를 해석하리라는 뜻 - 역자)


될 수 있는 대로 각자 나름의 종교대로 실천하라는 교황의 노골적인 초대를 어찌 상대주의의 의미14)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나는 순례자로서 성 프란치스코의 마을로 갈 것이다. 그와 함께 나는 여러 교파로 된 내 그리스도교 형제들, 세계의 종교 전통의 대표자들 그리고 욕심을 부린다면 좋은 뜻을 가진 선남선녀들을 이 순례에 합류하도록 초대할 것이다. 이는 모든 종교를 믿는 자들의 공약을 장엄하게 갱신하기 위함이며, 그들은 평화라는 대의를 향한 봉사로서 자기 나름의 종교를 사는 이들이다.15)


1986년에 한 기자가 이 발언의 맺음말을 출판했다.

교황은 종교들의 국제연합(United Nations of Religions)을 창안하고 주관하고 있다. 천주를 믿는 자들, 수많은 잡신을 믿는 자들, 이렇다 할 수 없는 신을 믿는 자들. 기겁할 광경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대성을 인정하다니, 참으로 볼 만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제 다른 종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16)


2011년 10월 27일 저녁에 많은 사람이 이런 견해를 공유할 것임을 어찌 상상치 못하리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생각에 2011년의 아씨지는 1986년의 아씨지와 다르다는 것을 구실로 교황을 그런 죄에서 면제해 주는 것은 이상야릇한 것 같다. 도리어 모든 사정이 서로 작용하는 것을 보니 1986년의 아씨지 모임과 2011년의 아씨지 모임은 놀랄 만큼 서로 연관돼 있다고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모임의 성격: 평화를 위해 성찰하고 기도하기 위해 그릇된 종교 대표자들더러 모이라는 초대

동기: 유엔이 촉구한 시민의 평화. 1986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아씨지라는 도시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특별한 모임을 갖자고 선동하며, 유엔이 평화의 해로 정한 그 1986년에’17) 모든 종교들을 초대했다. 2011년 1월 1일 평화를 위한 메시지에서, 베네딕토 16세는 2011년 10월 27일에 아씨지에서 모임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뜻이 깊은 짧은 글에 서명했다.


 [위대한 종교들에 대한] 그런 기본 경험이 없다면, 보편성 있는 윤리 원칙을 지향하는 단체들을 인도하고 국가 수준과 국제 수준의 합법한 질서를 확립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합법한 질서는 1948년 ‘세계 인권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의 목표--슬프게도 아직도 무시되거나 반박을 당하고 있는--에서 발표된 대로의 기본권과 기본 자유를 완전히 인정하고 존중한다... 이 모두가 필요한 것이며 세계인들이 1945년 유엔 헌장(Charter of United Nations)에 소중히 담아 놓은 인간의 존엄성 및 가치와 일치한다...18)


 1999년 제2차 아씨지 스캔들에 즈음하여 필레 주교가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편지를 썼듯이, 이번 모임에서 채택된 주제는 인도주의에다가 세속적이고 자연론의 성격을 띤다. 그것은 교회를 완전히 천주께 속해 있고 영원하며 초자연의 성격을 띤 사명으로부터 프리메이슨의 이상(理想)이라는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의 이상은 유일한 평화의 군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의 평화이다.19)


 날짜: 베네딕토 16세는 이 첫 25년을 아씨지 기념 축제 후의 날까지 잡기로 했다.

즉, 2011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6년에 아씨지에서 소집한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 25주년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추억하는 것은 미래를 기대해도 좋은 이유를 제시한다. 미래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실제로 정의와 평화의 대리인이 될 것이다.20)


 이는 분명히 연관돼 있다는 명백한 표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 베드로 교회 감실 위의 부처 스캔들, 성녀 글라라의 제대 위에서 온갖 잡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닭, 달라이 라마의 옆에 선 그리스도의 대리자 그리고 KGB에 짓밟힌 그리스 정교회의 총대주교라는 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방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목표가 사건과 멀어지는 것인 마당에, 그 사건의 기념일을 챙기는 일이 필요할까? ‘그런 경험을 추억하는 것이 희망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바티칸 시와 전 세계에(Ubi et Orbi)’를 선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논리정연한 생각의 배반만이 그렇게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했을 수 있다.21)


 전임자에 대한 회상, 그는 그 어떤 오해이건 불식시키고 자신이 제1차 아씨지 모임에 충실하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일깨우고 싶어 하기라도 하는 양, “올해 2011년은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 25주년이다. 존경하올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이 날에 아씨지에서 회의를 소집했다.”22)


 교황의 충실한 옹호자들만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을 합리화하려고 그와 똑같은 논거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기도하기 위해 한데 모이는 것’과 ‘함께 기도하는 것’을 교활하게 구분하는 것으로써 아씨지를 변호했다. 이번에 그들은 공동의 기도는 없고 공동으로 기도하는 날이 있을 거라고 말할까?


 소리를 내지 않는 기도가 공존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대신 모든 이가 각자 나름의 종교에 따라 따로 기도한다고 말할까? 마치 명분이 필요해서 이렇듯 허울만 그럴싸한 구별이 지어진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마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교묘함을 즉시 간파하지 못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가지만은 잊지 않을 것이다. 아무 계시에서건 뽑아내어, 신격을 향해 기도한답시고 모든 이를 대표하여 모든 종교가 모였다는 것을.


 결국 현 교황의 대부분의 처신이 전임 교황에 비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씨지 2011이라는 스캔들도 본질을 볼 때 1986년의 아씨지보다 결코 못하지 않게 똑같이 볼 만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줄을 빌미로 애덕이 부족하다며 우리를 고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올려 주는 바이다.


 “너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모든 힘과 모든 뜻으로 상주 네 천주를 사랑하고 또 네게 가까운 자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누가 10,27) 우리가 신성모독을 공공연히 비난하지 못하는 자들 혹은 신성모독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자들을 비난해야,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일까? 우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스캔들에 대해 경고하지 못해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 이런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사랑일까? 그렇지 않다. 성 비오 10세께서 암흑의 시기에 일깨워 주셨듯이,


 허나 가톨릭 교리는 우리에게 말해 주기를, 애덕의 첫째 의무는 그릇된 생각이 아무리 호감이 가더라도 그것을 참는 것에 있지 않음이요, 우리의 형제들이 빠지는 오류와 악덕을 향한 이론의 무차별 혹은 실질 무차별에 있지 않음이요, 우리 형제들의 세속적 안녕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력과 도덕의 향상을 도모하는 열정에 있다고 함이로다. 나아가 가톨릭 교리는 알려주기를,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은 천주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됨이요, 천주는 모든 이에게 아버지요, 온 인종의 목표라고 함일세라.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선을 행할 때에는 그리스도께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지체로다. 다른 종류의 사랑은 어떤 것이든 순전히 헛되고 덧없는 환상이로다.2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가? 서머나(Smyrna, 스미르나)의 성 폴리카르포(St. Polycarp, 156년에 서머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 되었고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다.


 이때 폴리카르포는 밀고를 당해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말했으나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 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 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 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고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카르포 기념교회를 세우고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의 교회에? 이단자 마르키온(Marcion, 그노시스파 성향을 지닌 2세기 그리스도교의 이단 사상가)은 성 폴리카르포에게 “나를 인정하는가?”라고 물었다. 성 폴리카르포는 이단자 마르키온(Marcion)의 그 물음에 “그렇다. 난 그대를 악마의 큰 아들로 인정한다.”라고 대꾸했다.


우리는 성 마르티노(St. Martin)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 성 마르티노는 우상을 부수고 우리 지방의 우상에게 바쳐진 나무를 베어 넘어뜨렸다.


우리는 성 베르나르(St. Bernard)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 성 베르나르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십자군을 설교했다.


우리는 성 비오 5세(St. Pius V)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 성 비오 5세는 묵주신공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회교도에 맞서 싸우자며 그리스도교 군주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빌라도(Pilate)와 같은 자들의 교회, 코숑(Cauchon,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가 화형을 당할 때 마녀 재판을 주재한 보베(Beauvais) 교구의 주교)와 같은 자들의 교회, 라므내(Lamennaise)와 같은 자들의 교회,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과 같은 자들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 그들은 세상에 아첨하여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을 내어 줄 준비가 돼 있기까지 하다.


우리는 신앙의 눈, 교황과 순교자들의 눈, 혹은 속물과 자유주의자와 현대주의자들의 눈으로 아씨지를 판가름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교황은 교황직의 최고로 심각한 행위 중 하나를 준비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잘 준비된 비운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고 간구하면서 강력하고 공공연하게 의분을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1999년에 필레 주교가 일깨워 준 이야기를 생각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발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에도 들어 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아씨지의 그 앙화로운 사건에서 ‘시대의 표징’ 중 하나를 보았다. 시대의 표징으로 인해 대주교는 교황의 승인 없이 합법하게 주교성성을 계속하고 ‘공개 협조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24)고 교황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죄악이 진행됨에도 “지옥의 문도 교회를 쳐 이기지 못하리라.”는 굳은 소망을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한 채 보속을 행하기 위해 그 스캔들을 보상할 때가 왔다.
 
2011년 9월 12일, 찬송 성모 성명(Holy Name of Mary) 첨례일, 1683년에 비엔나(Vienna)에서 가톨릭 군대가 터키의 회교도를 이긴 것을 기념하는 날.


성 비오 10세의 사제회 총장인 베르나르 필레 주교의 허가를 얻어 인쇄됨.